ADVERTISEMENT

금리 올리긴 올려야 하는데 … 중앙은행 발목 잡은 저물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5면

주요국 중앙은행이 물가의 덫에 걸렸다. 세계 경제에 서서히 훈풍이 분다. 중앙은행은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유동성 잔치를 끝낼 준비를 한다. 그런데 복병이 생겼다. ‘물가 딜레마’다.

가계·기업 부채 늘고 자산 가격 급등 #세계경제 살아나 풀린 돈 회수 압력 #저임금 취업, 유통혁신으로 가격 하락 #물가 너무 낮아 긴축정책 명분 부족

세계 금융위기로 망가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주요국 중앙은행은 유동성 잔치를 벌였다.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까지 내렸다. 약발이 나타나지 않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 완화(QE)’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구사하며 시중에 돈을 풀었다. 소방수로 등장한 중앙은행의 총력전으로 세계 경제는 살아났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경제성장률은 3.2%를 기록했다. 미국은 2014년(2.6%)과 2015년(2.9%) 견실한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에도 1.5% 성장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경우 6월 실업률이 9.1%를 기록하며 2009년 5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도 경기 회복세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문제는 요지부동인 물가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살아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다. 하지만 주요국의 물가는 다른 모습이다. 올 2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분기 대비)은 미국(1.9%), 유로존(1.5%), 한국(1.9%) 등에서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치를 밑돌았다. 대대적인 통화 완화정책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2분기에 0.4% 오르는 데 그쳤다.

가격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을 제외한 근원물가상승률은 주요국 대부분이 1%대에 머물고 있다. 재닛 옐런 미 Fed 의장이 “올해의 낮은 물가상승률은 미스터리”라고 말할 정도다.

막대한 유동성을 거둬들이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인상과 보유자산 축소 같은 ‘긴축’으로 서서히 기수를 돌리고 있다. 가계와 기업 부채가 늘고 주식 등 자산 가격이 과도하게 오르는 등 ‘금융 불균형’이 심화해서다.

물가 안정은 통화정책의 핵심 목표다. 그런데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중앙은행이 긴축으로 방향을 틀 명분이 약하다. 경기 회복에도 물가가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기준금리 인상의 근거가 빈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국감에서 “경기와 물가 간의 상관관계 약화가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한은이 9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도 같은 내용이 담겼다.

7일 공개된 10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서도 낮은 물가상승률에 대한 고민이 드러났다. 한 금통위원은 “낮은 물가상승률을 이유로 통화정책 완화 기조를 장기간 유지하면 금융 불균형이 심화하고 중기적 시계에서 물가상승 압력이 확대할 수 있지만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을 하회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통화정책 완화 정도를 축소하면 경기 둔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물가를 야기하는 구조적 요인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노동 생산성 증가세 둔화 ▶임금 협상력이 약한 시간제 취업자 비중 증가 ▶인구 고령화에 따른 고용과 임금 관계 약화 등의 구조적 요인으로 경제 성장의 영향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은에 따르면 유로존의 시간제 취업자 비중은 2007년 18.6%에서 지난 2분기 21.7%로 증가했다.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뿐만 아니라 세계화와 ‘아마존 효과’로 불리는 유통구조 혁신으로 제품 가격 상승이 제한된 것도 물가를 억누르는 요인으로 꼽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가계와 기업의 기대 인플레이션이 과거보다 낮은 것이 물가가 낮은 수준에 머무는 요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저물가가 구조적인 현상으로 빚어지는 만큼 더는 중앙은행의 정책 판단에 필수 사항이 될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술 진보와 혁신이 전 세계의 비용을 낮춰 물가 하락 압력을 가하는 만큼 물가목표치는 임의로 보인다”며 “물가 억제가 더는 Fed와 ECB의 의무 사항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