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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모스다] (36) '만년 꼴찌' 포디움 오르다 (상) : 타임트라이얼이 지루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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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해밀턴, 세바스티안 베텔, 페르난도 알론소 등 현역 F1 스타를 비롯해 미하엘 슈마허, 루벤스 바리첼로, 마크 웨버, 젠슨 버튼, 니코 로즈버그 등 은퇴한 F1 스타까지.

전남 영암군의 코리아인터내셔널 서킷에서 개최됐던 F1 코리안 그랑프리. 영암=사진공동취재단

전남 영암군의 코리아인터내셔널 서킷에서 개최됐던 F1 코리안 그랑프리. 영암=사진공동취재단

[사진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홈페이지]

[사진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홈페이지]

이들이 한국에서 화려한 기량을 선보이던 적이 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포뮬러1(F1) 코리안그랑프리가 열린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KIC)에서다.

KIC는 전라남도 영암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F1 서킷으로 F1 서킷 기준, 총 길이 5.615km에 18개의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소위 '쇼트 코스'로 불리는 상설 서킷은 총 길이 3.045km, 10개 코너로 구성된다.

[준비도 없이 맞이한 시즌 마지막 경기]

(사)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 협회장 손관수)가 최초로 공인한 아마추어 모터스포츠 대회 '엑스타 슈퍼챌린지'의 2017 시즌 마지막 경기인 5라운드 경기가 지난 5일, 영암 KIC에서 개최됐다.

당초 이 경기는 지난달 15일 강원도 인제군의 인제스피디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본래 예정일을 보름가량 앞둔 가운데 갑작스러운 인제스피디움의 '사정'을 이유로 돌연 경기 날짜와 장소가 변경됐다.

경기 일정 변경만으로도 참가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직장인 드라이버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 기간 '인륜지대사'를 앞둔 예비신랑으로서는 더더욱 말이다. '예비 신랑' 신분으로 치르게 될 줄 알았던 경기는 '새신랑' 신분으로 치르게 됐고, 덕분에 타이어나 브레이크, 엔진오일 등 각종 소모품류에 대한 점검·교환도 없이 서킷을 향했다. 평범한 '주 6일 직장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대회를 치르는 데에 쉽지 않았는데 '가장(家長)'의 타이틀이 더해지니 차보다 가정 살림살이가 우선이 됐기 때문.

라이선스 갱신 및 연습주행을 위해 1년여 만에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을 다시 찾았다. 사진 박상욱 기자

라이선스 갱신 및 연습주행을 위해 1년여 만에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을 다시 찾았다. 사진 박상욱 기자

KIC는 F1 개최를 위해 마련된 서킷인 만큼 트랙의 레이아웃 면에선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도권 거주자 입장에선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곳 중 하나다. 서울 기준(서울특별시청 기점), 인제스피디움까지 오가는 길은 왕복 320km인 반면 KIC는 왕복 730km에 달한다. 충청권의 경우(대전광역시청 기점) 인제 왕복 540km, 영암 왕복 500km고, 부산 기준(부산광역시청 기점) 인제 왕복 900km, 영암 왕복 600km다.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다. 지난 2016시즌 대회 참가를 위해 처음으로 KIC의 서킷 라이선스를 취득한 이후, '라이선스 유효기간'인 1년이 한참 지나서야 이곳을 찾게 된 이유다.

["어서 와, 영암은 처음이지?" 마음을 비우고 즐기는 마음으로]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라이선스의 갱신을 위한 실기 시험 과정. 그리드에 정렬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박상욱 기자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라이선스의 갱신을 위한 실기 시험 과정. 그리드에 정렬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박상욱 기자

모든 서킷마다 주행을 위한 별도의 라이선스를 요구한다. 모터스포츠 규정과 해당 서킷에 대한 정보 등 이론 교육을 실시하고, 이에 대한 필기시험 및 실기 시험 등을 거쳐 라이선스가 발급된다. 지난해 KIC 라이선스를 처음 발급받은 만큼, 올해엔 별도의 이론 교육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의 유효기간이 만료돼 갱신을 위한 필기 및 실기 시험이 필요해 대회 전날 KIC를 찾았다.

'예비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몇 차례 인제스피디움을 찾은 게 서킷 경험의 전부였던 '새신부' 못지않게 '새신랑'에게도 KIC는 낯설었다. 지난해 봄, 어떻게 주행을 했었나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 물론,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들과 10초 가까운 랩타임 차이가 날 정도의 '만년 꼴찌'였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스마트폰을 꺼내 다른 선수들의 주행 모습이 촬영된 '인캠' 영상을 살펴봤다.

라이선스 갱신 및 연습주행을 위해 1년여만에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을 다시 찾았다. 사진 박상욱 기자

라이선스 갱신 및 연습주행을 위해 1년여만에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을 다시 찾았다. 사진 박상욱 기자

마치 영상의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화면을 노려보던 사이, 익숙한 차량 한 대가 패독에 등장했다. 지난 시즌, 이 대회의 디젤 클래스 모든 라운드에서 포디움에 올랐던 '김형'이다. 나홀로 서킷을 찾아 외톨이처럼 홀로 경기 시간을 기다릴 때, 먼저 다가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형'이 KIC를 찾은 것. 2015, 2016시즌 디젤 클래스를 휩쓸고 올해는 대회 참가를 하지 않고 있는 '김형'은 친구와 동생들의 경기를 응원하고 지켜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대회 전날, 라이선스 갱신과 함께 두 차례 연습 주행에 나섰다. 타이어 트레드뿐 아니라 브레이크 패드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아 과한 연습은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여기에 KIC 주행 경험이 두 차례뿐이고, 새로운 차와는 처음이었던 만큼 마음을 비우고 코스를 익히자는 취지에서 연습에 임했다.

저울에 올려놓은 차량의 무게는 1590kg. 이날 트랙데이 겸 연습주행에 나섰던 같은 조 차량 가운데 가장 무거운 수치다. 대회 규정을 통해 최고출력에 제한이 있고, 그로 인해 각 차량마다 출력 차가 10~20마력 안팎인 상황. 중량에서의 이점은 곧 더 빠른 기록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난 2년간 1640kg의 육중한 차량으로 서킷에서 고군분투했던 만큼, '턱걸이'지만 1500kg대 중량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다.

['오바로크'로 심신 다스리기]

사진 박상욱 기자

사진 박상욱 기자

오전 연습주행 결과 얻은 기록은 1분 35초 874로 11명 중 3위. 오후엔 이보다 소폭 앞당긴 1분 35초 429로 5명 중 제일 빠른 기록을 남겼다. 이날 트랙데이 참가자 중 다음날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은 일부였고, 포디움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드라이버들은 없었던 만큼 등수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KIC에서의 마지막 주행이었던 지난해 슈퍼챌린지 5라운드에서 기록한 1분 42초 567보다 6초 넘게 줄어든 셈. 소위 '쩜초'라고 부르는 소수점 단위의 초를 앞당기기도 쉽지 않았기에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사진 박상욱 기자

사진 박상욱 기자

넉넉한 치수의 옷을 입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지난해와 올해, 2년에 걸쳐 입었던 레이싱수트는 흡사 훈련소에서 갓 지급받은 '똥 싼 바지'와도 같은 핏을 자랑했다. 못 해도 신장이 15cm는 더 크고, 몸무게도 15kg은 더 나가는 사람이 입어도 될 수트였다 보니 착용 시 느껴지는 무게감도 상당했던 터.

대회를 앞두고 몸에 맞는 사이즈의 국제자동차연맹(FIA) 인증 레이싱수트를 새로 장만했다. 공식 대회에 출전하는 만큼 레이싱수트엔 규정에 따라 지정된 패치가 부착되어야 한다. 선수들의 편의를 위해 이 패치의 뒷면엔 양면테이프가 부착되어 있지만, 시트에 앉아 몸을 움직이다 보면 떨어지기에 십상이다. 10여년 전, 경남 진주시 금산면 속사리의 한 훈련소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오바로크'를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대회 규정에 따라 레이싱수트엔 지정된 패치가 부착되어야 한다. 사진 박상욱 기자

대회 규정에 따라 레이싱수트엔 지정된 패치가 부착되어야 한다. 사진 박상욱 기자

KIC에서의 마지막 대회는 하나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주행 도중 브레이크 패드뿐 아니라 브레이크 시스템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메인 스트레이트에서의 최고속 직후 감속 과정에서 브레이크는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다행히 KIC의 1번 코너 주변 안전지대는 넓은 편이었기에 엔진 브레이크 등을 통해 사고를 면했다. 패드의 내구성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점검과 쿨링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다.

이번 대회는 바로 이 사건 이후의 대회였고, 이번에도 차량의 상태는 최상이 아니었던 상황. 브레이크 패드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타이어 트레드는 그야말로 '슬릭 타이어' 일보 직전이었다. 앞선 연습주행에서도 그랬지만 어택과 쿨링 랩을 2대 1로 할 만큼 충분한 쿨링을 했고, 어택 중에도 과도한 브레이킹을 피하며 최대한 부드러운 주행이 요구됐다. 여기에 수백km 떨어진 곳까지 어여쁜 신부가 동행했으니 이번 대회의 목표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무사완주'와 '자력복귀'다.

[베테랑 '김형'의 '신의 한 수'…시트 떼어내기]

규정 중량보다 150kg 가까이 무거웠던 만큼 감량에 나섰다. 운전석을 제외한 모든 시트를 탈거했다. 사진 박상욱 기자

규정 중량보다 150kg 가까이 무거웠던 만큼 감량에 나섰다. 운전석을 제외한 모든 시트를 탈거했다. 사진 박상욱 기자

대회 당일,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즐기다 가자'고 생각하고 찾은 KIC였지만 35초대 기록이 나오면서 약간의 승부욕이 발동했다. 뒷좌석과 조수석을 현장에서 탈거하기로 한 것. 일일 감독으로 나서준 '김형'의 "무게는 줄이자"는 조언도 한몫했다. 감량을 통해 기록에서도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타이어나 브레이크 등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렇게 해서 대회에 나선 차량의 무게는 1520kg. 여전히 같은 클래스 출전 차량보다 무겁지만, 전날 연습 주행 대비 70kg 가까운 무게를 덜어냈다.

일반적으로 카레이싱 하면 '스프린트(Sprint) 방식'을 떠올린다. 동시에 출발한 드라이버들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기 위해 몸싸움과 추월을 거듭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열광한다. 반면, '단일 랩타임이 가장 빠른 이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타임트라이얼(Time Trial) 방식'에 대해선 "그거 예선전에서나 하는 방식 아니냐"며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과연 그럴까. 타임트라이얼 경기 역시 드라이버나 팀 스태프, 감독 등의 전략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과 순위 변동이 벌어진다. 주어진 경기 시간인 20분 사이, 순위는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드라이버 사이 희비가 교차한다.

[타임트라이얼은 지루하다? 천만의 말씀!]

2017 엑스타 슈퍼챌린지 챌린지 D 클래스 시즌 종합 1위에 오른 조수호 선수의 역주 장면. [사진 슈퍼챌린지 홈페이지]

2017 엑스타 슈퍼챌린지 챌린지 D 클래스 시즌 종합 1위에 오른 조수호 선수의 역주 장면. [사진 슈퍼챌린지 홈페이지]

올해 슈퍼챌린지의 디젤 타임트라이얼 클래스인 '챌린지 D' 클래스에선 2리터급 디젤 차량(최소중량 1450kg, 최고출력 220마력)과 1.6리터급 디젤 차량(최소중량 1100kg, 최고출력 180마력)은 각각 '마력당 무게비'가 6kg/ps 가량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마지막 라운드인 이번 경기에서도 시즌 종합 1, 2위의 조수호 선수와 홍석하 선수는 1분 33초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중위권 다툼도 치열했다. 시즌을 거듭할 수록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 되면서, 찰나의 실수로 순위가 뒤바뀌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2017 엑스타 슈퍼챌린지 5라운드 챌린지 D 클래스에 참가한 차량들. 사진 박상욱 기자

2017 엑스타 슈퍼챌린지 5라운드 챌린지 D 클래스에 참가한 차량들. 사진 박상욱 기자

오전에 실시된 5라운드 1차 주행에서 1분 34초 743을 기록, 3위에 올랐다. 이는 개인 최고 기록으로, 전날 연습주행보다 0.7초 가량 단축된 기록이다. 4위와의 격차는 1.278초였지만 3등에 오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타이어의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최대한 빨리 페이스를 끌어 올려야 했다. 하지만 경기 초반, 좀처럼 기록 단축이 이뤄지지 않았다. 도리어 전날보다 후퇴한 1분 36초 후반의 기록이 이어진 것이다. "김건희 선수, 35초 5로 3등. 페이스 올리자" 무전을 잡은 '김형'이 경기 진행 상황을 전했다. '역시는 역시인가…', '꼴찌는 어쩔 수 없이 꼴찌인 건가' 만감이 교차했고, 전날 연습주행의 기록은 꿈만 같았다.

조금씩 페이스를 높여 35초대에 들어갔지만 4~5위 사이에서 좀처럼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트랙에 들어선 후 10분이 지나고, '김형'은 "박상욱 1분 34초 7, 3위"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경기 종료 약 7분을 앞둔 상황에서 드디어 순위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어진 랩에서도 마찬가지로 34초대의 랩을 기록했다. "오후에도 타야 하니까, 이제 그만 쿨링하고 들어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김형'은 피트로 돌아오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 박상욱 기자

사진 박상욱 기자

과연 모터스포츠 입문 3년차, '만년 꼴찌'를 거듭하던 가운데 처음으로 포디움(시상대)에 오를 수 있을까. 관건은 오후에 남은 2차 주행이다.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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