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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지리산 오지(奧地)에 ‘예술인마을’ 만든 촌장과 예술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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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온 마르코 비안키와 바르바라 그로시가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국악인들과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페라 공연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탈리아에서 온 마르코 비안키와 바르바라 그로시가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국악인들과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페라 공연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28일 오후 전남 구례군 광의면의 산 중턱. 마을의 한쪽에 자리 잡은 갤러리 겸 레스토랑에 모인 주민 30여 명이 “사랑해요”를 연신 외쳤다. 2012년 4월 7일 문을 연 ‘구례 예술인마을’에 입주한 예술인들이었다.

전남 구례의 이색 '예술인촌', 예술·힐링마을 각광 #서울·경기 출신 등 30명이 2008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둥지 #김태호 전 홍대 교수와 제자들 주도로 조성 시작 #2010년부터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로 다변화 #매주 토요일엔 회화·도자기·인형 체험장 변신

이날 주민들은 판소리와 오페라 공연이 동시에 열린 음악회를 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지리산 자락에 조성된 산골 마을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행사였다. ‘동서양의 만남’이란 테마로 열린 이날 공연에는 예술인마을에 사는 예술인들과 인근 주민 등 200여 명이 함께 했다.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인형박물관을 운영하는 김춘동씨가 마을을 찾은 독일인 관광객과 어린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구운 피자를 나눠주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인형박물관을 운영하는 김춘동씨가 마을을 찾은 독일인 관광객과 어린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구운 피자를 나눠주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참석자들은 이탈리아에서 온 테너 마르코 비안키(74)와 바르바라그로시(39·여)의 오페라 공연과 국악인 조선하(35)씨의 판소리를 보며 연신 박수와 환호를 쏟아냈다. 마을 예술인들이 매주 토요일 마다 여는 ‘토요 오픈 스튜디오’의 개장 2주년을 기념한 공연이었다. 서양화가인 손한희(60·여)씨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예술인마을의 진면목을 보여준 축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의 산 자락에 조성된 예술인마을이 예술과 자연을 주제로 한 힐링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2008년부터 서울과 경기 등에 사는 전국의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터를 잡은 테마 마을에는 현재 30가구가 입주해 있다.

산 중턱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건물에서는 서양화가와 동양화가·도예가·조각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작품 활동을 한다. 매주 토요일에는 지역 주민들과의 상생과 재능기부 차원에서 토요 오픈 스튜디오를 열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원래 지리산 속 오지(奧地)였던 8만5950㎡ 면적이 하나의 예술 체험장이자 작품 전시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구례 예술인마을의 촌장인 김태호 전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마을이 형성된 과정과 의미, 향후 조성 방향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의 촌장인 김태호 전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마을이 형성된 과정과 의미, 향후 조성 방향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예술인마을은 입주 초반에는 김태호(67) 전 홍익대 미술대 교수와 제자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 작업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시작이었다.
김 전 교수는 “지리산 자락이 좋겠다던 제자의 말을 듣고 구례를 찾았는데 작품 활동을 하기에 최상의 입지여건을 갖춘 곳이란 판단이 섰다”고 말했다. 현재 김 전 교수는 구례 예술인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다.

국악인 조선하씨가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이탈리아 가수들과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소리 공연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국악인 조선하씨가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에서 이탈리아 가수들과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소리 공연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 전 교수는 “예술인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역민들과 동떨어져 지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지역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연 친화적인 힐링 공간을 조성해 자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예술마을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예술인마을은 2010년 이후 마을 조성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지리산에 예술인촌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과 경기도 쪽 예술인들이 잇따라 합류를 한 것이다.

구례 예술인마을에 입주한 예술인들이 지난달 28일 오픈 스튜디오 2주년 공연이 끝난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에 입주한 예술인들이 지난달 28일 오픈 스튜디오 2주년 공연이 끝난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예술 장르 역시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정착을 희망하면서 초기 서양화가 중심에서 동양화가와 조각가·건축가 등으로 확산됐다. 구례군은 이 과정에서 지역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 차원에서 진입도로와 상하수도, 주차장 등 기반시설을 조성해줌으로써 예술마을의 탄생을 도왔다.

주민들이 만든 ‘마을 규약’도 예술인마을이 빠른 속도로 자리 잡는데 한몫을 했다. 규약의 주된 내용은 ^부지 구매 후 6개월 내 반드시 건물을 착공해야 한다 ^건물은 최소한 25평 이상 지어야 한다 ^저가의 자재를 사용해서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 등이다. 도예가 최범창(51)씨는 “천혜의 자연여건과 깐깐한 마을규약 등을 보면서 모범적인 예술인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구례 예술인마을에 입주한 박기웅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마을이 형성된 과정과 입촌을 결심한 계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에 입주한 박기웅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마을이 형성된 과정과 입촌을 결심한 계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박기웅(58) 홍익대 미대 교수 역시 일찌감치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예술가다. 해외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그는 2010년 11월 마을에 입주했다. 서울과 구례를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구례 지역이나 예술인마을에 금속조형물을 세우는 등 창작 활동과 재능기부를 병행하고 있다.

2012년 4월 개촌한 마을을 널리 알린 것은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 마을을 찾은 탐방객들이 입주 예술가들과 함께 다양한 예술 활동을 체험하거나 공유하는 이벤트다. 현재는 도자기·회화·인형·판화 등 작업실 7곳이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방문객을 맞는다.

구례 예술인마을 내 ‘한갤러리’에서 서양화가인 손한희 대표가 아들 김준기씨와 그림을 그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 내 ‘한갤러리’에서 서양화가인 손한희 대표가 아들 김준기씨와 그림을 그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오픈 스튜디오’는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한 갤러리’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림이 있는 식탁’을 테마로 한 갤러리 레스토랑과 카페가 연중 365일 문을 연다. ‘판소리와 오페라의 만남’이란 테마로 열린 2주년 기념 공연도 이곳에서 열렸다.

서양화가인 손한희(60·여) 대표의 작업실을 겸한 카페 한쪽에는 아트숍도 꾸며져 있다. 마을에 입주한 작가들이 만든 도자기와 수공예아트 등을 판매한다.

구례 예술인마을을 찾은 독일인 관광객과 어린이들이 인형박물관에 전시된 세계 각국의 인형들을 만져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을 찾은 독일인 관광객과 어린이들이 인형박물관에 전시된 세계 각국의 인형들을 만져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깨어나다 인형박물관’은 어린이와 여성에게 인기가 높은 공간이다. 문화인류학자인 김춘동(65)씨가 외국의 전문 컬렉터로부터 기증받은 세계 각국의 인형들로 박물관을 꾸몄다. 김씨는 매주 토요일이면 자신이 직접 구운 피자를 탐방객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평생 음식과 문화를 연구해왔다"는 그는 이곳 오픈 스튜디오 참가자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임금희 대표가 운영하는 구례 예술인마을 내 ‘아뜰리에 뷰(View)’를 찾은 학생들과 탐방객들이 추상화와 야생화 등 현대미술을 체험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임금희 대표가 운영하는 구례 예술인마을 내 ‘아뜰리에 뷰(View)’를 찾은 학생들과 탐방객들이 추상화와 야생화 등 현대미술을 체험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아뜰리에 뷰(View)’에서는 추상화와 수채화·야생화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화가인 임금희(59·여) 대표의 작품을 관람하면서 구례 지역 학생들과 탐방객들이 다양한 현대미술을 배워간다.

전희원(15·구례여중2)양은 “2년째 그림지도를 받고 있는데 서울 등 대도시를 가지 않고도 미술에 대한 수준 높은 안목을 키울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다양한 도자기를 체험할 수 있는 ‘화수분’을 찾은 탐방객들이 직접 자기를 빚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다양한 도자기를 체험할 수 있는 ‘화수분’을 찾은 탐방객들이 직접 자기를 빚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다양한 도자기를 체험할 수 있는 ‘화수분’에도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도예가인 최범창(51)씨의 작품들을 관람한 뒤 직접 도자기를 빚어볼 수 있다. 컵이나 접시·쟁반·공룡·꽃 같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어 어린이나 여성 방문객들에게 인기다. 참가자들이 빚은 자기는 유약을 입혀 구운 뒤 각 가정으로 배달을 해준다.

구례 예술인마을 내 ‘판공방’을 찾은 탐방객들이 김경희 대표에게 '규방공예'를 배우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 내 ‘판공방’을 찾은 탐방객들이 김경희 대표에게 '규방공예'를 배우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판공방’은 다양한 판화작품과 소품들을 체험·판매하는 곳이다. 대표인 김경희(46·여)씨와 함께 천연염색에 기존 판화를 접목한 공예작품들을 만들어볼 수 있다. 오픈 스튜디오가 열리는 토요일이면 머리핀이나 팔찌 만들기 체험도 한다. 김씨는 “원래 판화공방을 운영했는데 우연히 전남 나주를 찾았다가 천연염색의 매력에 빠져 규방공예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 내 ‘갤러리 풀(Full)’을 찾은 외국인 가수들과 탐방객들이 세계 각국의 옻공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28일 구례 예술인마을 내 ‘갤러리 풀(Full)’을 찾은 외국인 가수들과 탐방객들이 세계 각국의 옻공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갤러리 풀(Full)’은 옻공예 작가인 김나래(29·여)씨의 옻칠 예술작품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도자기와 금속을 결합해 다양한 색감이 돋보이게 한 옻공예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마을 중간에 자리한 ‘굿데이 갤러리펜션’은 마을의 쉼터 역할을 한다. 서정수(68) 대표와 화가인 부인 손영숙(58·여)씨가 마을 방문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운영한다. ‘그림이 있는 방’을 테마로 꾸며진 갤러리에서 손 작가와 해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구례 예술인마을 ‘굿데이 갤러리펜션’의 서정수 대표와 부인 손영숙 화가가 펜션 마당에 있는 ‘제비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구례 예술인마을 ‘굿데이 갤러리펜션’의 서정수 대표와 부인 손영숙 화가가 펜션 마당에 있는 ‘제비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 마을의 토요 오픈 스튜디오가 빠른 속도로 정착한 데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관광두레’의 역할도 컸다. 지역 주민의 힘으로 조직을 꾸리고 주민 역량에 맞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새로운 관광사업 모델이다.

‘구례 관광두레’의 경우 이 마을의 오픈 스튜디오에 대한 사업계획 수립부터 창업 멘토링, 기념품 제작 등을 지원해왔다. 신연숙(48) 구례 관광두레 PD는 “2015년 하반기부터 주민과 함께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2년여 동안의 노력 끝에 주민이 만드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례 예술인마을 내 조형물.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례 예술인마을 내 조형물.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오픈 스튜디오는 지리산 둘레길을 낀 천혜의 풍광 속에서 다양한 예술 장르를 체험할 수 있어 예술인들이나 가족 단위 탐방객에게 인기다. 마을 인근에는 화엄사와 수목원·휴양림·온천 등 지리산 주변의 문화·관광자원도 많다.

마을의 부촌장인 김동환(68) 전 청주대 교수는 “마을에 입주한 예술가들 모두가 2년째 진행 중인 오픈 스튜디오나 재능기부 등을 통해 지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례=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의 예술인마을 전경. '지리산 둘레길'을 낀 마을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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