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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세] 낙태금지 탓···성폭행범 아이 낳아야 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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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세]강간으로 임신해도 낙태 못하는 나라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세계의 낙태 신호등과 정치 권력 #한국은 주홍색...사우디, 케냐와 동급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를 위한 국민 청원이 20만명을 넘었습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20만명을 넘은 건 '만 14세 미만은 형사처분을 받지 않는다'는 현행 소년법 개정 요구 청원 이후 두 번째입니다.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기다리는 가운데 낙태에 대한 논란도 재점화됐습니다.

낙태는 비단 한국만의 논란거리는 아닙니다. 미국에선 10대 소녀의 낙태 허가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 국내뿐 아니라 아프리카 여성의 낙태까지도 어려워졌습니다. 왜일까요. [고보면 모있는 기한 계뉴스]에서 세계 각국의 낙태 신호등을 알아봅니다.

21살에 두 아이 엄마...뱃속엔 무뇌아 태아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2017년 9월 낙태 비범좌화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여성. 엘살바도르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나라다. AFP PHOTO / MARVIN RECINOS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2017년 9월 낙태 비범좌화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여성. 엘살바도르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나라다. AFP PHOTO / MARVIN RECINOS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허핑턴포스트는 남미 니카라과의 임신부 익셀리스(21)의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익셀리스는 노숙자입니다. 이미 5살과 3살짜리 두 아이를 거리에서 홀로 키우고 있죠. 게다가 마약에 중독됐습니다. 초음파 검사 결과 태아는 팔과 다리, 뇌가 없고 심장의 기능도 떨어져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선 어떤 형태의 낙태건 모두 불법이기에 익셀리스는 태아의 심장 박동이 완전히 멎기를 기도해야 했습니다.

휴먼 라이트 워치에 따르면 니카라과에선 낙태한 여성은 2년 이하 징역형, 시술한 의료진은 최고 징역 6년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10년엔 아말리아라는 여성이 임신 10주 상태에서 암을 발견했지만 의료진의 거부로 낙태 시술도, 항암 시술도 받지 못하다 임신 8개월 만에 사산하고, 암으로 사망하기도 했죠.

애가 애를 낳는 '강간의 나라'

칠레 산티아고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활동가가 태아 모형을 들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칠레는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왔으나 최근 성폭행에 의한 임신, 임신부 생명이 위험할 때, 태아 생존 가능성이 희박할 때 등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쪽으로 완화했다. AFP PHOTO / CLAUDIO REYES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칠레 산티아고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활동가가 태아 모형을 들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칠레는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왔으나 최근 성폭행에 의한 임신, 임신부 생명이 위험할 때, 태아 생존 가능성이 희박할 때 등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쪽으로 완화했다. AFP PHOTO / CLAUDIO REYES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하바나 타임스에 따르면 니카라과에선 지난 10년간 14세 이하 소녀 1만6400명이 출산했습니다. 매년 1640명의 초등~중2 학생이 엄마가 되는 겁니다. 15~19세 여성의 임신율도 1000명당 100명(월드뱅크, 2010년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이 나라에선 한해 성폭력 사건이 6000건 이상 발생(2013년 기준)합니다. 국가 인구보건 조사(2012년)에 따르면 여성 10명 중 8명이 18세 이전에 강간당한 경험이 있고, 그중 절반은 14세 이전에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낙태를 할 수 없으니 소녀는 강간범의 아이를 낳습니다. 이런 경우 강간범과 함께 살며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학업도 중단하게 돼 익셀리스처럼 빈곤과 또 다른 임신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합니다.

보수 표심 노린 낙태 금지 10년

지난 9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4;여기, 국가가 결정하지 말라&#34;는 문구를 배에 적어 낙태의 비범죄화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여성들. AFP PHOTO / JUAN MABROMATA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9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4;여기, 국가가 결정하지 말라&#34;는 문구를 배에 적어 낙태의 비범죄화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여성들. AFP PHOTO / JUAN MABROMATA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런데 이 나라가 처음부터 낙태를 전면 금지한 건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정부가 무료로 콘돔을 나눠주고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포함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대선을 앞두고 무신론자였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가톨릭으로 전향하고 낙태 무관용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보수표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낙태 관련 정책은 이렇듯 정치권력의 의도에 쉽게 휘둘립니다. 당장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 초 취임한 이래 세계 여성들의 고통이 커졌습니다. 보수 표심을 바탕으로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 1월 소위 '낙태 재갈령'이라 불리는 '멕시코 시티 정책'을 확대하는 행정명령으로 낙태와 관련한 상담을 제공하는 의료단체와 비영리 기구(NGO)에 대한 자금 원조를 중단했거든요.

트럼프 탓에 낙태 못 하는 아프리카 여성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난 9월 열린 &#39;선택을 위한 행진&#39; 시위. 아일랜드의 엄격한 낙태 법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최초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Tom Honan/PA via AP)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난 9월 열린 &#39;선택을 위한 행진&#39; 시위. 아일랜드의 엄격한 낙태 법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최초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Tom Honan/PA via AP)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멕시코 시티 정책은 미국 연방 기금 지원을 받으려는 NGO들이 다른 나라에서 가족계획 방법으로 낙태를 실행하거나 적극 홍보하지 못하게 한 협약입니다. 역대 민주당 정권은 이를 폐지하고, 공화당 정권은 되살리는 등 정쟁 도구로 사용됐죠. 2009년 1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폐지한 걸 공화당의 트럼프 대통령이 8년 만에 살렸습니다. 그 범위 역시 과거 가족계획 자금(6억 달러)에 한했던 걸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모든 국제 의료 보조금(90억 달러)으로 전면 확대했습니다.

영국 인디펜던트 등 외신들은 이 때문에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는 아프리카 여성들이 위기에 놓였다고 보도했습니다. 의료기관들이 미국의 명령을 따르면 비전문가들의 불법 시술로 목숨을 잃거나 건강을 해치는 여성이 늘 것이고, 반대로 낙태를 도우면 돈줄이 말라 HIV(에이즈)나 말라리아 같은 다른 질병 구제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가족건강선택(FHO) 케냐지부는 이미 예산을 절반으로 줄이고, 암과 HIV 검진 등의 봉사활동 100건을 취소했습니다.

불법체류자는 낙태도 불법? 

지난 10월 활동가들이 17세 불법체류자 소녀의 낙태 권리를 지지하는 시위를 미국 워싱턴 정부청사 앞에서 열고 있다. (AP Photo/J. Scott Applewhite)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10월 활동가들이 17세 불법체류자 소녀의 낙태 권리를 지지하는 시위를 미국 워싱턴 정부청사 앞에서 열고 있다. (AP Photo/J. Scott Applewhite)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국 내에서도 낙태 논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낙태는 합법입니다. 하지만 미 하원은 지난달 임신 20주부터는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겼습니다. 낙태를 '헬스 케어'가 아닌 '범죄'로 보게 되는 법안이라며 미국에선 논란이 뜨겁습니다. 하원은 나아가 지난 1일(현지시간) 임신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안에 대해서도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여성들은 빨라야 6주차에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전면 금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17세 불법체류 소녀 제인 도의 낙태 허가 여부도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소녀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멕시코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 억류된 뒤 이런저런 검사를 받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죠. 낙태하려 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를 막자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다 연방 정부에 구금된 청소년의 낙태 "촉진"을 거부하는 새로운 정책을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수백명의 임신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이 억류돼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소송에 나선 소녀는 법정 공방 끝에 임신 15주째에 간신히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 늦어졌다면 산모도 위험해질 수 있었죠.

세계의 낙태 신호등

비영리기구 생식권리센터(CRR)가 운영하는 세계낙태법(www.worldabortionlaws.com) 홈페이지에선 전세계 낙태 관련 법 현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에선 빨간색부터 초록색으로 낙태 자유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낙태가 제한된 곳일수록 빨간 신호가 켜집니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빨간색이 몰려 있습니다. 그중 낙태를 완전 금지한 나라는 니카과라·도미니카공화국·엘살바도르·아이티·온두라스·수리남·몰타와 바티칸 등 몇 되지 않으며 그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계 낙태 법 지도 홈페이지. 한국은 주홍색이다. 동아시아권에선 두드러지게 낙태가 까다로운 나라다.

세계 낙태 법 지도 홈페이지. 한국은 주홍색이다. 동아시아권에선 두드러지게 낙태가 까다로운 나라다.

한국은 주홍색으로 낙태에 보수적인 축에 속합니다. 법적으론 근친상간·강간의 경우 낙태가 허용되며, 임신부의 나이나 태아의 주수 등의 영향도 받습니다. 낙태 시술을 하려면 상대방(정자 제공자)의 동의가 필요하고요. 한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요르단·에티오피아·케냐·나이지리아·나미비아·알제리아·카메룬·태국·파키스탄·말레이시아 등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 다음 단계는 귤색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사회·경제적 이유로도 낙태가 허용돼 귤색에 해당합니다. 인도·짐바브웨·영국·핀란드·아이슬란드 등도 귤색입니다.

지도상에서는 녹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가장 넓습니다. 성별 선택을 위한 낙태를 제외하곤 자유로운 중국도 녹색입니다. 1950년~85년 사이에 거의 모든 선진국이 낙태를 자유화했습니다. 1994년 179개국 정부가 안전한 낙태를 위한 '인구 및 개발 프로그램 행동 계획'에 서명한 이후 자유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칠레 대통령의 제한적인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지난 7월 산티아고에서 누드로 행진했다. (AP Photo/Esteban Felix)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칠레 대통령의 제한적인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지난 7월 산티아고에서 누드로 행진했다. (AP Photo/Esteban Felix)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생식권리센터는 홈페이지에서 "북반구와 동아시아 국가는 가장 자유로운 낙태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폴란드, 몰타,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추세에 반하는 낙태법을 유지한다"고 설명합니다.

랜싯 보고서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낙태 4분의 3이 불법적으로 행해져 산모의 목숨을 위험하게 합니다.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포함하면 한해 1710만 건의 위험한 낙태 시술이 이뤄집니다. 반면 낙태에 관대한 서유럽의 낙태율과 모성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한국의 낙태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지난 8월 칠레 법원 앞에서 낙태 찬반론자들이 각각 집회를 여는 가운데 한 여성이 손바닥에 태아 모형을 들고 있다. (AP Photo/Esteban Felix)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8월 칠레 법원 앞에서 낙태 찬반론자들이 각각 집회를 여는 가운데 한 여성이 손바닥에 태아 모형을 들고 있다. (AP Photo/Esteban Felix)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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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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