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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한 자리서 3대 72년…하루 3시간만 여는 꼬리찜 전문 ‘순흥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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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 3대 72년을 이어온 노포 ‘순흥옥’의 대표메뉴 꼬리찜에는 꼬리 세 토막(굵은 것, 중간, 끝부분)과 감자 한 덩이를 넣고 데친 파를 듬뿍 올려준다. 전국에서 유일한 스타일이다. ‘꼬리찜정식’이라는 이름으로 국물에 소면·공깃밥을 함께 내준다.

직계 3대 72년을 이어온 노포 ‘순흥옥’의 대표메뉴 꼬리찜에는 꼬리 세 토막(굵은 것, 중간, 끝부분)과 감자 한 덩이를 넣고 데친 파를 듬뿍 올려준다. 전국에서 유일한 스타일이다. ‘꼬리찜정식’이라는 이름으로 국물에 소면·공깃밥을 함께 내준다.

어두육미(魚頭肉尾)라 했던가. 물고기는 대가리 쪽이 맛이 있고, 짐승 고기는 꼬리 쪽이 맛이 있다는 말이다. 말은 익숙한데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사슴 꼬리[鹿尾]를 치긴 했지만 옛날얘기고, 왕실에서나 먹을 수 있는 진미였다. 요즘 짐승 꼬리 가운데 일반인이 먹을 만한 것으로는 소 꼬리가 있을 뿐이다.

메뉴 2가지뿐…오전 11시~오후 2시 영업
소 꼬리찜(1만7000원)과 곰탕(1만원) 두 가지만 파는 음식점이 있다. 찜이든 탕이든 이 집 음식을 받고 보면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다들 놀란다.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스타일에 양념 방식도 희한하다. 흔히 ‘파 범벅 꼬리찜’이라고 부른다. 사람마다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린다. 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할 수 없는 음식이다.

메뉴가 꼬리찜과 곰탕 두 가지뿐이어서 안내도 간결하다.

메뉴가 꼬리찜과 곰탕 두 가지뿐이어서 안내도 간결하다.

1945년 현재의 자리에서 창업해 3대 72년 역사를 이어왔다. 1976년 시어머니에게 주방을 물려받은 2대 김춘자(79) 여사가 41년 동안 주방을 지키면서 2000년부터 음식점을 관리하는 5대 독자 이종화(47) 씨에게 3대 대물림을 하고 있다. 전국에서 자리도, 주인도 바뀌지 않고 70년 넘게 직계 3대를 이어온 음식점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평일 닷새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하루 3시간만 영업을 한다. 매주 토·일요일과 달력에 빨갛게 표시한 날은 모두 쉰다. 계산해보면 1년 중 문 여는 날이 250일에 못 미친다. 영업시간이라도 준비한 음식이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좌석은 1층 36석, 단체 예약을 주로 받는 2층 방에 좌식 20석 정도가 있다. 낮 12시 이전이나 오후 1시 이후에 가면 자리가 비교적 넉넉하다. 을지로4가역 6번 출구로 나가 방산시장 가는 길 뒷골목에 있는 ‘순흥옥(서울 중구 을지로33길 9/전화 02-2265-0953)’이다. 간판이 어지럽게 걸린 상가 골목에 음식점 표시라고는 옥호 세 글자만 보일락말락 붙어있고, 입구는 좁아 처음 가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복도 같은 좁은 통로를 몇 걸음 들어가면 작은 마당과 주방이 나온다.

을지로4가역 6번 출구에서 인쇄골목과 방산시장으로 이어지는 길 초입에 있는 ‘순흥옥’은 간판도, 입구도 작아 처음 가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야 찾을 수 있다.

을지로4가역 6번 출구에서 인쇄골목과 방산시장으로 이어지는 길 초입에 있는 ‘순흥옥’은 간판도, 입구도 작아 처음 가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야 찾을 수 있다.

‘순흥옥’ 출입문을 들어가면 골목 같은 작은 통로가 나온다. 그 안으로 대지 129㎡(39평) 집의 작은 마당과 주방이 연결된다.

‘순흥옥’ 출입문을 들어가면 골목 같은 작은 통로가 나온다. 그 안으로 대지 129㎡(39평) 집의 작은 마당과 주방이 연결된다.

‘순흥옥’ 옥호를 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경북 영주시 순흥(順興)을 생각하면 섣부른 짐작이다. 1년에 한두 번쯤 10여 년 이 집을 다닌 나도 주인 고향이 순흥이거나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틀렸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전혀 관계가 없단다.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순조롭게 흥하라’는 기원을 담아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소 꼬리, 잔손 많이 가 다루는 음식점 적어
소 꼬리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식료품이 아니다. 소 한 마리에서 한 개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귀하다. 귀하다 보니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소 꼬리와 족이 사람에게 왜 좋은지 뭔가 근거가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꼬리는 여름 내내 등에 붙은 파리를 쫓느라 휘둘러대고, 발은 겨우내 언 길을 갈 때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기운을 집중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걸 먹으면 모자라는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근래엔 대개가 수입품이니 예전처럼 귀할 이유는 없지만, 음식으로 만드는 과정에 잔손질이 많이 가서 음식점에서 다루기를 꺼린다. 반(半)조리 상태로 포장해서 나오는 제품도 있지만, 기계적으로 한꺼번에 많이 끓이면 특유의 졸깃한 맛을 살리지 못해 소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삶아서 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꼬리찜. 오후 1시 무렵이어서 7인분 정도 남았다. 하루 70~80인분을 준비한다.

삶아서 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 꼬리찜. 오후 1시 무렵이어서 7인분 정도 남았다. 하루 70~80인분을 준비한다.

1인분씩 그릇에 담아 놓은 꼬리 토막과 감자 덩이. 여기에 데친 대파를 듬뿍 올리고 끓는 국물에 7~8차례 토렴하면 꼬리찜이 완성된다.

1인분씩 그릇에 담아 놓은 꼬리 토막과 감자 덩이. 여기에 데친 대파를 듬뿍 올리고 끓는 국물에 7~8차례 토렴하면 꼬리찜이 완성된다.

꼬리찜에 얹으려고 미리 데쳐둔 대파.

꼬리찜에 얹으려고 미리 데쳐둔 대파.

갈비찜을 토렴하는 국물. 찜에 들어가는 대파를 이 국물에 데치고, 찜에 따라 나가는 국물로 쓰기도 한다. 곰탕은 꼬리 삶은 국물에 소금과 고춧가루 양념만 하지만 찜 국물에는 생강·마늘이 더 들어간다.

갈비찜을 토렴하는 국물. 찜에 들어가는 대파를 이 국물에 데치고, 찜에 따라 나가는 국물로 쓰기도 한다. 곰탕은 꼬리 삶은 국물에 소금과 고춧가루 양념만 하지만 찜 국물에는 생강·마늘이 더 들어간다.

꼬리찜을 토렴하는 모습. 끓는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기를 7~8회 반복한다. 꼬리를 식지 않도록 계속 가열하면 젤라틴 성분이 너무 녹아 특유의 쫀득한 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적당히 삶아 뒀다가 토렴해 따뜻하게 내는 방식을 쓰는 듯 보였다.

꼬리찜을 토렴하는 모습. 끓는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기를 7~8회 반복한다. 꼬리를 식지 않도록 계속 가열하면 젤라틴 성분이 너무 녹아 특유의 쫀득한 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적당히 삶아 뒀다가 토렴해 따뜻하게 내는 방식을 쓰는 듯 보였다.

옛날에도 흔히 먹지 못했는지 기록이 많지 않다. 왕실 잔치 음식으로 꼬리곰탕을 올린 기록은 있지만 찜 얘기는 찾기 힘들다. 1809년(순조 9) 빙허각 이씨가 엮은 『규합총서』에 ‘우미증방(牛尾蒸方)’이 실려 있다. 한자의 뜻은 ‘소 꼬리찜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내용은 꼬리곰탕 끓이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살찐 쇠꼬리를 뿌리의 살째 무르녹게 삶아 잘게 찢어 쇠약가리와 부아 삶은 것을 썰어 함께 기름장에 후추붙이·깨소금을 섞어 주무르고 삶은 파를 많이 넣어 청장에 고추장 약간 섞어 국을 만들면 개국과 같되 맛이 특별하다”고 했다.

‘뿌리의 살’은 반골(엉덩뼈)에 붙은 살을 말한다. 소 꼬리는 꼬리뼈와 반골로 구성된다.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꼬리뼈는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고, 반골에는 살코기와 기름기가 붙어 있다. 요즘 음식점에 들어오는 소 꼬리는 대부분이 수입품이라 반골까지 있는 물건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쇠약가리’는 아마 갈비의 어떤 상태를 이르는 듯하다. ‘약’은 옛말로 양념이다. 이렇게 보면 양념갈비다. 그런데 바로 뒤에 기름장·후추·깨소금에 주물러 양념을 한다는 말이 나와 자연스럽지 않다. 접두사로 ‘약’을 쓰면 ‘약한’의 뜻이 더해진다. ‘약한 갈비’라면 무슨 말일까. 갈비 자투리나 마구리를 말할까. ‘부아’는 허파를 말한다. 예전에도 소 꼬리가 귀하니까 다른 고기를 섞어서 탕을 끓인 모양이다. 맛을 개국에 비교한 걸 보면 개국이 더 일반적인 음식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꼬리찜에는 꼬리 세 토막, 감자 한 덩이에 데친 파를 듬뿍 올려준다. 꼬리는 굵은 것, 중간, 끝부분을 고르게 섞어 담는다.

꼬리찜에는 꼬리 세 토막, 감자 한 덩이에 데친 파를 듬뿍 올려준다. 꼬리는 굵은 것, 중간, 끝부분을 고르게 섞어 담는다.

꼬리찜정식 한 상 차림. 꼬리곰탕 상(6찬)보다 반찬 2가지(오른쪽 끝 접시)가 더 오른다. 여기에 소면 사리와 공깃밥이 더 나온다.

꼬리찜정식 한 상 차림. 꼬리곰탕 상(6찬)보다 반찬 2가지(오른쪽 끝 접시)가 더 오른다. 여기에 소면 사리와 공깃밥이 더 나온다.

신세대 단골들 "지구 최강 파 범벅 꼬리찜"

‘순흥옥’의 꼬리찜과 곰탕은 독특하다. 인터넷 세대 단골들은 ‘지구 최강 파 범벅 꼬리찜’이라고 말한다. ‘파 범벅 꼬리찜’은 한국에서 이 집이 유일한데 소 꼬리를 한국처럼 해 먹는 나라가 없을 터이니 지구에서 최강이라는 것이다. 큰 대접에 삶은 꼬리 세 토막과 감자 한 덩이 담고 데쳐 둔 대파를 수북하게 얹은 다음 끓는 꼬리 국물로 7~8차례 토렴해서 낸다. 상에 올리기 직전 반 토막으로 잘라서 데친 파를 먹기 좋게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준다. 『규합총서』 설명 중 “삶은 파를 많이 넣어”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조합이다.

꼬리 살은 적당히 익어 쫄깃하고 꼬들꼬들하다. 뜯어 먹는 재미가 있다. 꼬리 끝부분을 먹을 때는 토종닭 정강이 살을 뜯는 듯하다. 젤라틴 성분이 많은 꼬리 근육의 특성을 살리면서 질기지 않고 너무 무르지도 않게 잘 삶았다. 적당하게 삶은 덕에 고기의 향미도 풍부하다. 김 여사는 “2~3시간 삶으면서 고기를 손으로 만져보면 느낌이 온다. 너무 삶으면 뼈가 쏙 빠져 버려서 모양도 안 나고 살이 너무 퍼져서 맛이 없다. 손으로 만져 적당하다 싶을 때 건져서 식혀 뒀다 토렴한다”고 설명했다. 토렴하는 국물은 꼬리곰탕과는 약간 다르다. 꼬리를 삶아낸 뒤 소금·고춧가루·생강·마늘 양념을 해 끓인 것이다. 김 여사는 “미O(MSG 계열 조미료)도 조금 넣는다. 조금은 꼭 넣어야 한다. 마늘은 넣고 싶으면 넣고 안 넣어도 된다”고 했다. 국물을 끓을 때 찜에 얹는 대파를 데치기도 한다. 이 국물이 꼬리찜에 따라 나간다.

꼬리찜에 따라 나오는 국물을 인터넷에는 멸칫국물이라고 소개한 경우가 많은데 꼬리 삶은 물에 소금·고춧가루·생강·마늘 넣고 화학조미료를 조금 넣은 것이다.

꼬리찜에 따라 나오는 국물을 인터넷에는 멸칫국물이라고 소개한 경우가 많은데 꼬리 삶은 물에 소금·고춧가루·생강·마늘 넣고 화학조미료를 조금 넣은 것이다.

꼬리찜정식 국물에 말아서 먹도록 나오는 소면과 밥. 밥은 양이 많지 않다.

꼬리찜정식 국물에 말아서 먹도록 나오는 소면과 밥. 밥은 양이 많지 않다.

발라낸 꼬리 살에 파를 곁들여 양념간장 찍어 안주 삼아 먹고 있으면 아무 건지도 들어있지 않은 맑은 꼬리탕 한 대접과 삶은 소면, 두 숟갈쯤 담긴 공깃밥이 나온다. 국물은 그냥 먹어도 시원하지만, 상에 놓인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조금씩 풀고 소면을 말아 먹으면 아주 신기한 맛이 난다. 이 방식은 김 여사가 개발했다. 파가 잡내를 없애고 국물을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파도 좋아하더라는 축적된 경험도 작용했다. 소면·파·감자 추가는 각각 1000원을 받는다. ‘가성비 최고 꼬리찜’이라는 평도 듣는데 아들 이씨는 “원재료 자체가 가성비가 좋지 않다 보니 크게 내세우기는 어렵다”고 했다.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넣어 양념
꼬리곰탕은 창업주인 시어머니로부터 김 여사가 물려받은 것이다. 삶은 꼬리를 건져낸 국물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타고 계속 끓인다. 대접에 꼬리 한 토막과 데친 대파 한 줌 띄우고 끓는 국물을 덜어 담으면 꼬리곰탕 한 그릇이 만들어진다. 주문할 때 ‘뺀 거’라고 하면 대파를 넣지 않은 곰탕을 준비해준다. 곰탕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풀고 소면을 말아 먹는 건 꼬리찜 먹을 때와 같다. 손님들이 찜과 탕을 주문하는 비율은 80~90% 대 10~20%. 탕이 값은 싸지만, 마진율은 높은데 손님은 찜에 몰린다.

네이버 검색 화면의 '순흥옥' 안내.

블루리본 서베이의 '순흥옥' 소개 글.

네이버와 레스토랑 가이드북 ‘블루리본 서베이’ 홈페이지에 보면 이 집을 소개하면서 “큼지막한 감자와 고기 위에 파를 푸짐하게 올려서 내오는 꼬리찜의 맛이 일품이다. 따로 나오는 멸치국물에는 갓김치와 김을 넣고 간을 해서 밥이나 소면을 말아 먹는 맛이 좋다”고 했다. 여러 블로그에도 이 집 국물이 멸칫국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맛이 고깃국물 같지 않고 시원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이씨에게 물으니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누가 그런 말을 처음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얘기 많이 한다. 전혀 아니다. 소 꼬리 삶은 국물이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옆에서 “꼬리 국물이 원래 시원하다”며 거들었다.

꼬리찜이나 꼬리곰탕 국물에 양념 삼아 넣으라고 나오는 갓김치.

꼬리찜이나 꼬리곰탕 국물에 양념 삼아 넣으라고 나오는 갓김치.

꼬리찜이나 꼬리곰탕 국물에 양념 삼아 넣으라고 나오는 파래김 무침.

꼬리찜이나 꼬리곰탕 국물에 양념 삼아 넣으라고 나오는 파래김 무침.

창업주인 할머니가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김 여사와 1938년생 동갑인 남편이 여덟 살(한국식 나이)이었다고 한다. 그 기억에 따르면 개업한 해는 1945년이다. 초창기에는 잡뼈 국물에 된장 풀고 우거지 넣고 끓인 해장국이 주력이었다. 선지는 넣지 않았다고 한다. 설렁탕·우족을 함께 했고, 우설 구이도 메뉴에 있었다. 해장국이 맛있다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하루에 소 9마리분의 잡뼈를 고아 쓰던 시절도 있었다. 김 여사는 “지금은 그런 잡뼈를 구할 수 없어서 옛 맛을 낼 수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때는 통행금지 풀리는 새벽 4시 조금 지나 을지로에 전차 첫차가 나가면 문을 열었다.

이종화씨가 일곱 살(한국식 나이) 때 주방을 책임지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물려받았다. 그 전에도 두어 해 동안은 할머니가 가끔 편찮을 때마다 주방 일을 대신 하면서 일을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맡은 것은 1976년이다. 그때부터 다른 메뉴는 점차 정리하고 꼬리에 집중했다. 꼬리만 다룬 지 40년쯤 된다.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넣어 양념을 한 모습.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넣어 양념을 한 모습.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넣어 양념을 하고 소면을 말았다.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넣어 양념을 하고 소면을 말았다.

예전엔 김희갑·박노식 등 명배우들 단골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로 국물에 간을 하는 방식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시작했으니까 내력이 35년 안팎 됐다. 처음엔 국물이 맛있으니까 손님이 국수를 찾아서 삶아줬더니 너도나도 달라고 해 국물에 소면 사리는 고정으로 주게 됐다. 소면 말아 먹을 때 잔치국수처럼 김을 올리면 맛이 더 좋을 것 같아 파래김 무침을 상에 놨다. 그걸 본 손님이 갓김치 얘기를 하기에 해봤더니 반응이 좋아 그대로 정착됐다. 갓김치를 한동안 묵은지로 내다가 요즘은 오래 묵히지 않은 거로 낸다. 일손이 없어서 많이 담그지 못해 묵히지 못한다. 조금씩 담가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묵은지와 덜 익은 것, 두 갓김치에 대한 손님들 반응은 반반이다.

끓고 있는 꼬리곰탕 국물. 꼬리 삶은 물에 소금·고춧가루와 화학조미료가 약간 들어갔다. 그릇에 꼬리 한 토막과 데친 대파 담고 국물을 부으면 꼬리곰탕이 완성된다.

끓고 있는 꼬리곰탕 국물. 꼬리 삶은 물에 소금·고춧가루와 화학조미료가 약간 들어갔다. 그릇에 꼬리 한 토막과 데친 대파 담고 국물을 부으면 꼬리곰탕이 완성된다.

꼬리곰탕 한 상 차림.

꼬리곰탕 한 상 차림.

상에 바로 나온 꼬리곰탕.

상에 바로 나온 꼬리곰탕.

꼬리곰탕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양념을 한 모습.

꼬리곰탕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양념을 한 모습.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양념이 섞이도록 꼬리곰탕을 휘젓자 꼬리 토막이 드러난다.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양념이 섞이도록 꼬리곰탕을 휘젓자 꼬리 토막이 드러난다.

한국 영화가 충무로에서 다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동네가 가까우니까 영화인들이 손님으로 많이 왔다. 2층에서 가족이 살림을 하고 1층에 식당을 했기 때문에 밤새 어디선가 무슨 일을 한 배우나 스태프들이 통행금지가 풀리면 찾아와 해장국 달라고 대문을 두드렸다. 고 김희갑·박노식 씨 같은 당대 일류 배우들이 자주 왔다.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충무로는 영화인들이 많이 떠났고, 예전 단골이나 큰 손님들은 현업에서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거나 돌아가시면서 다 빠져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손님들뿐이었는데 최근에는 오랜 단골들이 와서 보고는 젊은 손님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도 50대 이상 손님이 70% 넘는다. 3대 사장이 태어나기 전부터 다니는 단골도 꽤 있다.

‘순흥옥’ 외며느리로 2대째 대물림해 1976년부터 41년 동안 주방을 지킨 팔순의 김춘자 여사. 2014년 뇌수술을 해 늘 모자를 쓰고 있다. 어머니 건강을 염려한 아들이 영업시간을 하루 3시간으로 줄였다.

‘순흥옥’ 외며느리로 2대째 대물림해 1976년부터 41년 동안 주방을 지킨 팔순의 김춘자 여사. 2014년 뇌수술을 해 늘 모자를 쓰고 있다. 어머니 건강을 염려한 아들이 영업시간을 하루 3시간으로 줄였다.

김 여사는 2014년 뇌수술을 했다. 그래서 늘 모자를 쓰고 있다. 대물림을 받아야 하는 며느리는 손이 귀한 집에서 늦게 둔 쌍둥이가 이제 다섯 살밖에 안 돼 집에서 꼼짝 못 한다. 아빠가 42세에 쌍둥이 딸을 얻었으니 얼마나 끔찍이 예쁠까. 바쁠 때는 며느리가 돕기도 하지만 시간 내기가 어려워 김 여사는 아들에게 자꾸 그만두자고 한다. 이거 말고 딴 궁리해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3대를 잇고 있는 이씨는 아이들이 좀 자라면 저녁에도 장사하고 싶다며 의욕을 보인다.

예전만 못한 방산시장…밤엔 인적 드물어
그렇지만 상황은 좋지 않다. 방산시장 주변인 이 동네엔 저녁이면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상권이 활기를 잃어 장사가 잘 안되니까 직원 없이 혼자 점포를 지키는 사업자들이 많아졌다.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점심은 배달시켜 먹고 돈이 잘 안 벌리니 저녁은 집에 가서 먹는 사람들이 늘어 손님이 없다. 모자(母子)는 “요새 젊은이들은 안 온다. 아버지 따라 와봤던 사람들이나 간간 올까. 먹어본 사람들만 어쩌다가 와서 먹는다. 예전에 많이 오던 시장 사람들, 인쇄 골목 사람들도 별로 안 온다. 오히려 먼 데서 손님들이 찾아온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해 8월 전면 리모델링한 실내. 좌석은 36석이다. 이전에는 이곳 전체가 방바닥에 앉아서 먹는 좌식이었다.

지난해 8월 전면 리모델링한 실내. 좌석은 36석이다. 이전에는 이곳 전체가 방바닥에 앉아서 먹는 좌식이었다.

지난해 8월에는 젊은이 친화적으로 식당을 리모델링했다. 할아버지가 광복 이전에 산 한옥을 조금씩 조금씩 고쳐 쓰다가 요즘 사람들도 불편하지 않게 내부를 전체적으로 개조했다. 한옥에서 시작한 음식점이라 이전엔 바닥에 앉아서 식사하는 좌석뿐이었다. 이번에 1층은 모두 입식 식탁으로 바꿨다.

옥호도 교통정리를 했다. 예전 간판에는 ‘순흥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이름이 지명 ‘순흥’을 더 연상하게 했다. 초창기부터 간판하고 상관없이 사람들은 순흥집·순흥옥을 섞어 불렀다. 이 주변에 우래옥(1946년 개업)·문화옥(1952년)·강산옥(1958년)·보건옥(1980년 전후) 등 ‘옥’으로 끝나는 노포 음식점들이 골목을 돌아서면 하나씩 나온다. ‘옥’을 오래된 집의 돌림자쯤으로 여기는지 간판이 ‘순흥집’이든 뭐든 ‘순흥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집을 고치면서 옥호도 ‘순흥옥’으로 정리했다. 주변의 ‘옥’ 네 곳은 창업한 곳에서 자리를 옮겼지만 ‘순흥옥’은 처음 시작한 곳에서 옮기지 않고 외아들 대물림으로 72년을 이어왔다.

‘순흥옥’과 골목을 맞대고 있는 주교동과 방산동 일대에는 ‘옥’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노포 음식점이 여럿 있다. 이웃 골목에 나란히 있는 ‘우래옥’과 ‘문화옥’. 역사가 60~70년씩 된 음식점이다.

‘순흥옥’과 골목을 맞대고 있는 주교동과 방산동 일대에는 ‘옥’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노포 음식점이 여럿 있다. 이웃 골목에 나란히 있는 ‘우래옥’과 ‘문화옥’. 역사가 60~70년씩 된 음식점이다.

우래옥 다음 골목에는 불고기로 유명한 정육점 식당 ‘보건옥’이 있다. 역사가 40년 가깝지만 이 동네에서는 비교적 젊은 식당에 속한다.

우래옥 다음 골목에는 불고기로 유명한 정육점 식당 ‘보건옥’이 있다. 역사가 40년 가깝지만 이 동네에서는 비교적 젊은 식당에 속한다.

이때 바꾼 게 하나 더 있다. 시장 상인들을 위해 4000~5000원씩 싼값에 팔던 가정식 뷔페 아침 식사를 그만뒀다. 방산시장 주변의 동네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 손님이 줄었고 뇌수술까지 한 어머니 건강을 생각해 짧고 굵게 점심 영업만 하기로 했다. 하루 70~80인분 정도 준비해 그게 다 팔리면 장사 끝이다. 리모델링을 했더니 40~50년씩 다닌 어르신들은 섭섭해한다. “우리 추억까지 다 없어졌다”며 옛날얘기를 자꾸 한다. 신세대 손님들 취향에 맞춰 원두커피를 뽑아 마실 수 있는 커피머신도 갖췄다. 사용하는 손님이 아직은 많지 않다.

좌식이던 실내 지난해 입식으로 전면 수리
음식점을 오후 2시에 문 닫는다고 하면 그때부터 쉬는 줄 알지만 그건 아니다. 영업 마치면 주방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는 퇴근하고, 이씨 혼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다 보면 오후 8~9시는 돼야 집에 간다. 매일 커피머신 청소에만 꼬박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아침엔 7시 30분쯤 나와 소 꼬리 핏물 빼서 삶고, 파 다듬고 하면 11시에 손님 받기 빠듯하다. 온종일 매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 핏물 뺀 꼬리는 초벌 삶아서 가위로 일일이 기름기를 제거해야 한다. 예전에는 동대문시장 정육점에서 대놓고 썼는데 지금은 마장동에서 꼬리를 보내준다. 기름기를 1차 제거한 걸 받지만 삶으면 기름 덩이가 다시 드러나 식혀서 다듬어야 한다. 하루 10단 쓰는 대파도 다듬고 씻어서 손으로 뚝뚝 잘라 놓는다.

낮 12시 무렵의 주방. 오후 2시까지 사용하려고 다듬어 둔 대파가 수북하다.

낮 12시 무렵의 주방. 오후 2시까지 사용하려고 다듬어 둔 대파가 수북하다.

데치려고 준비한 대파. 길이를 반으로 툭툭 잘라놨다.

데치려고 준비한 대파. 길이를 반으로 툭툭 잘라놨다.

지난달 29일 점심영업이 막 끝난 시간의 ‘순흥옥’ 주방. 3대 사장 이종화씨는 이때부터 설거지와 청소하는 데 5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지난달 29일 점심영업이 막 끝난 시간의 ‘순흥옥’ 주방. 3대 사장 이종화씨는 이때부터 설거지와 청소하는 데 5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집수리하고 1년 2개월 됐는데 그사이 소 꼬리 원가가 40%나 올랐다. 원가가 올랐다고 음식값을 바로바로 올리지는 못하니까 원가 압박이 커 요즘 운영이 힘들다고 한다. 거래처에서는 꼬리를 안 먹던 중국 사람들이 먹기 시작해 다 사들이기 때문에 시세가 자꾸 오른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얘기다. 지난 4월에 국제 곡물 가격이 올라서 영향이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꼬리찜을 여러 곳에서 먹어본 손님들은 싸다고 하는데 이곳만 다니는 단골들은 왜 자꾸 올리냐고 한다. 아들은 “이것저것 따지면 2만원 이상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김 여사는 “시장 사람들 돈 없다”며 인상에 반대한다.

식당은 행정구역상 을지로4가이지만 앞길 건너는 주교동과 방산동이다. 주교동은 이 마을 126번지 북쪽 배오개다리쯤에 나무로 놓은 배다리[舟橋]가 있었기 때문에 배다릿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청계천에 물이 많을 때는 쪽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닌 모양이다.

배오개는 원래 배고개[梨峴]인데, 애고개[阿峴]가 애오개가 되듯 ‘고’에서 ㄱ이 탈락하면서 음이 변한 것이다. 고개는 종로4가 사거리~원남동 사거리 도로 위에 있었는데 길을 내면서 깎아 없어졌다. 종묘에서 벋어 나온 구릉의 한 줄기였다. 이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지금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 자리에 조선 시대에는 배오개시장이 있었다. 채소와 해산물을 많이 거래했다. 종루(현 종각) 앞 시전상가,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 후기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청계천 준설토 쌓았던 '꽃다운 산(芳山)'
방산동은 향기로운 산[芳山]이 있는 동네라는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는 청계천을 준설하며 퍼낸 토사를 지금의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종합시장 일대에 쌓아둬 생긴 언덕이 있었다. 맞은편인 동대문종합상가 일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가산(假山)·조산(造山)이라 불렀다. 토사 더미 언덕을 그냥 두기는 보기에도 흉하고 다시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갈 염려도 있어 무궁화 등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오던 이 지역을 1914년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꽃향기가 좋다 하여 방산동(芳山洞)으로 하였다.

조선 시대에 개천(開川)이라 부르던 청계천 준설은 조선왕조 후기의 국가적 대역사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선대왕의 사업과 실적은 곧 균역(均役)·탕평(蕩平)·준천(濬川)”이라고 정리했다(정조 즉위년 5월 16일 실록 기사). 영조 재위 56년간 3대 치적으로 ▷백성의 부담을 고르게 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청계천을 준설한 것을 꼽은 것이다.

준설의 필요성은 1751년(영조 27) 한성판윤 박문수(1691∼1756)가 주청하여 영조가 직접 광통교에 나가 상황을 점검하고 주변 백성들 의견을 들었다. 주민들은 “사람이 말을 타고 광통교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지금은 다리와 바닥이 맞닿아 있습니다. 작년에 파내긴 하였으나 1년 만에 또 이렇게 됐습니다”하고 시급함을 아뢰었다.

영조실록 부록에 실린 영조의 행장(行狀; 죽은 이의 일대기)에는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36년(1760) 경진 춘 2월에 준천하였다. … 『여지승람』에 개천(開川)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세종 때에 이선로가 더러운 물건을 투입하는 것을 금하여 명당의 물을 맑히기를 청하고,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상소하여 그 형세가 행할 수 없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세종께서 어효첨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셨다. 역대에서 세종 때의 일을 존중하고 믿어서 드디어 (개천의) 바닥을 쳐서 (물을) 소통시키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300여 년이 되므로 내[川]가 점점 막혀서 둑과 높이가 거의 같아져 장마 끝에는 이따금 넘치는 재앙이 있었다. 왕께서 … 여러 번 … 뭇 백성에게 물으셨는데, 모두가 쳐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어찌 백성의 힘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많은 돈을 내어 일꾼을 사서 쳐내게 하되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나 몇 달 안 가서 공역이 끝났다. 그래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1760년 3월 10일 영조는 오간수문에 나가 숙원사업이던 청계천 준설 작업을 참관하고 인부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격려했다. 그때 그린 그림인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1760년 3월 10일 영조는 오간수문에 나가 숙원사업이던 청계천 준설 작업을 참관하고 인부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격려했다. 그때 그린 그림인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영조, 현장 나가 격려…57일 만에 준설 마쳐

비용이 가장 큰 숙제였다. 국론을 모으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논의와 준비에 7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60년 2월 18일 본격 준설을 시작해 57일 만인 4월 15일에 끝냈다. 공사에는 21만5380명의 백성이 참여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300여명은 품삯을 받고 일했다.

공사 중이던 3월 10일 왕이 오간수문에 나가 준설 작업을 직접 참관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격려했다. 그때 그린 그림이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인데 준설사업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묶은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에 실려있다. 그림을 보면 개천 바닥에서 인부들이 삽·가래 등으로 토사를 파는 한편 소가 끄는 써레로 밀어 옮기는 작업을 하고, 양쪽 둔치에는 작업하는 사람들과 복장이 같은 사람 여럿이 음식상을 받고 있다. 왕이 참관한 것과 음식을 베푼 사실을 한 폭의 그림에 담으려다 보니 그렇게 그린 모양이다.

영조실록 4월 10일 기사에는 준설한 토사 처리와 관련하여 왕이 화를 낸 기록이 있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를 소견하고 준천 공사가 잘하는 일인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유척기가 말하기를 “준천을 해야 한다는 의논은 신이 늘 주장했습니다만, 모래를 운반하는 공역이 너무 커서 이를 어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몇만 명의 인부와 만여 냥의 재정을 들인다면 모래를 운반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이 모래를 모두 천변에 쌓아 두거나 길 위에 깔 경우, 모래는 흙과 달라 장마가 져서 냇물이 넘치면 천변에 쌓아 둔 모래가 저절로 무너져 내릴 수 있고 또 길 위에 깔아 놓은 것도 모두 내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이제 비록 준천을 하더라도 내가 금방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망연자실한 모양으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롭다고 하고 어진 자가 보면 어질다고 하는 법인데, 경은 말하기를 좋은 일이 못 된다고 하겠으나 나는 말하기를 좋은 일이라고 하겠다. 이 뒤로는 단 한 삽도 대지 않아도 100년을 안심할 수 있을 것인데, 경은 수작에 방해가 되니, 그만 물러가라.” 하였다.》

비용을 추가로 조달하기 어려워 토사를 한곳에 옮겨서 산처럼 쌓았고, 뒷날 향기로운 산으로 이름이 남았다.

지난달 29일 오후 점심영업을 끝내고 나란히 앉은 ‘순흥옥’ 3대인 아들 이종화씨와 2대 주방 책임자인 어머니 김춘자 여사.

지난달 29일 오후 점심영업을 끝내고 나란히 앉은 ‘순흥옥’ 3대인 아들 이종화씨와 2대 주방 책임자인 어머니 김춘자 여사.

‘순흥옥’ 3대 사장에게 4대로 대물림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굳이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뒷날 ‘직계 4대 100년 노포’에 앉아 파 범벅 꼬리찜을 먹는 향기로운 상상을 그만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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