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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300년 전 ‘페미니스트' 선비의 부인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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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갑진록(甲辰錄)'이라고 쓰여진 44쪽 분량의 일기책에는 전남 보성군에 살았던 임재당이라는 사람이 1724년 6월부터 1726년 5월까지 부인 풍산 홍씨를 생각하며 쓴 일기와 운율에 맞게 지은 한시 100편이 기록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표지에 '갑진록(甲辰錄)'이라고 쓰여진 44쪽 분량의 일기책에는 전남 보성군에 살았던 임재당이라는 사람이 1724년 6월부터 1726년 5월까지 부인 풍산 홍씨를 생각하며 쓴 일기와 운율에 맞게 지은 한시 100편이 기록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부부유별(夫婦有別)한 시대 조선의 선비들은 부인을 어떻게 대했을까. 사례 하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 #영조 때 임재당, 부인 죽자 100여편 시 남겨 #아이 못 가진 부인은 약 부작용으로 삶 마감 #가부장제의 규범 넘지 못한 사랑 깊이 후회

‘갑진년(1724년, 영조1년) 6월 29일. 아침 10시 (부인을) 도저히 살리지 못해 삶을 마치게 했으니 참으로 슬프다.’
‘6월 30일. 내동(처조카)이 시신을 염습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나….’

300년 전 부인을 홀연히 보낸 선비가 남긴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014년 고서 경매 사이트에서 발견된 일기 『갑진록』이다. 일기는 2년 뒤 5월 1일 기록이 끝날 때까지 부인을 그리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애틋한 사부곡(思婦曲)이다.

일기는 전남 보성에 살았던 선비 임재당(任再堂‧1678∼1726)이 한문으로 반듯하게 써 놓았다. 일기를 발굴한 조원경(60) 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은 2년 전 국역본 발간에 이어 지난달 14일 보성 ‘임재당 학술대회’에서 『갑진록』 원본을 장흥임씨대종회에 기증했다.

(사)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오른쪽)이 10월 14일 임정모 장흥임씨대종회장에게 임재당의 일기 『갑진록』을 기증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사)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오른쪽)이 10월 14일 임정모 장흥임씨대종회장에게 임재당의 일기 『갑진록』을 기증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선비는 부인을 염습한 날 부부가 함께 한 18년을 돌아보며 추억한다. ‘집사람은 1683년 계해 정월 초하룻날 자정쯤 태어나 42살에 삶을 마쳤다. 마음이 아름답고 행동이 단정하며 말이 적고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못 하는 게 없었다. 부부가 서로 공경함은 언제나 같았다…두 해 동안 내가 병으로 회복하기 어려울 때 아침 저녁 쉼 없이 병을 고치려고 간호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에게 “하늘이 돕는다면 반드시 남편보다 나를 먼저 데려가라”고 했다.’

선비는 복받치는 슬픔을 한시(漢詩)로도 남겼다.

‘남은 한은 너무 슬퍼 끝이 없고/병은 이리저리 다스렸지만 낫지 못했구려/당신 죽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니….’ 일기 가운데 쓴 이른바 도망시(悼亡詩, 부인이 죽은 뒤 쓴 시)는 무려 100편에 이른다. 도망시로 최대 분량이다.

임재당도 같은 해 부인 곁으로 

일기의 마지막(1726년)은 ‘집안이 모여 큰 형님 셋째 아들을 양자 삼기로 했다’고 돼 있다. 그때도 ‘집사람이 (양자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슬프다’며 부인을 떠올린다. 찬란한 슬픔의 기록이다. 그해 7월 임재당도 부인 곁으로 돌아간다. 적모지가(積慕之家)에도 필유여경(必有餘慶)일까. 임재당의 양자는 무과에 합격했고, 손자는 과거에 급제해 정6품 이조좌랑에 올랐다.

임재당이 부인이 죽은 뒤 3년 동안 그 슬픔을 기록한 일기 『갑진록』의 한 부분. [사진 김진만]

임재당이 부인이 죽은 뒤 3년 동안 그 슬픔을 기록한 일기 『갑진록』의 한 부분. [사진 김진만]

임재당과 부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부인은 대를 이을 아이를 얻으려고 온갖 약을 쓰다가 그 부작용으로 삶을 마감했다. 부인은 조선의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포함됐다. 임재당은 그런 제도와 규범을 뛰어넘어 못다 한 사랑을 통절히 후회한다.

『논어』 선진편 8장에서 공자는 수제자 안연이 요절하자 하늘을 원망하며 이렇게 탄식한다.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공자가 통곡을 그치지 않자 한 제자가 “선생님 통곡이 지나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통곡이 지나치다고? 이런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선진편 9장)고 반문한다. 공자는 이렇게 인(仁)을 실천했다. 제도나 체통에 앞서 사람이 먼저였다.

선비 임재당은 부부 사이에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선비는 속살을 벗기면 이렇게 페미니스트에 더 가까웠는지 모르겠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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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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