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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건 핏줄뿐"···숙청 얼룩진 김정은 패밀리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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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평양 권력 핵심에서 피비린내가 풍겨 온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해외에 은거 중인 조카 김한솔을 제거하기 위해 공작조를 파견한 정황이 포착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 2월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한 데 이어 그의 아들마저 없애는 ‘씨 말리기’ 차원이다. 화근을 미리 들어내겠다는 심산일 수 있다. 북한 김씨 패밀리의 잔혹한 숙청사를 통해 이른바 ‘곁가지’ 제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김정은의 속사정을 분석해 본다.

‘형제의 난’ 씨앗 뿌린 김정일 #아들 후계 옹립에 여인들 암투 #부친 죽음에 원한 품은 한솔 #김정은 부담 느껴 ‘씨 말리기’ #장성택 처형 등 잇단 피비린내 #잔혹한 숙청은 세습권력 업보

세습권력의 아킬레스건은 정통성 문제다. 북한 김정은 정권처럼 선대 지도자의 여성 편력 때문에 가계도(family tree)가 복잡다단할 경우엔 상황이 더 꼬이게 된다. 절대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들은 슬하의 아들을 후계자로 등극시키려고 암투를 벌인다. 죽음을 무릅쓴 자리다툼은 유혈까지 불러온다. 그 상흔과 앙금은 고스란히 자식들 몫이다. 권좌에 오른 승자는 철저한 응징으로 잠재적 불안요인의 싹을 자르려 든다. 패자는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북한의 세습 권력자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북한의 세습 권력자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지금 평양에서 벌어지는 불화와 대립의 씨앗을 뿌린 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1960년대 후반 당대의 인기 배우 출신 성혜림에 빠진 그는 동거에 들어갔고, 첫 아들인 정남을 낳았다. 다섯 살 연상의 유부녀를 강제 이혼시켜 차지할 정도로 불같은 사랑의 결과다. 상심한 남편 이평의 자살은 안중에도 없었다. 득남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는 성혜림의 언니 혜랑(서방 망명)씨의 자전소설 『등나무집』에 잘 드러난다. 71년 5월 10일 새벽 잠결에 자동차 경적소리가 요란해 4층 방 창문을 열고 보니 아래에 김정일이 서 있었는데, “이제 금방 혜림이가 아들을 낳았어”라는 말을 웃음과 함께 던지고 사라졌다는 제법 훈훈한 스토리다.

하지만 평양 왕세자의 사랑은 곧 식어버렸다. 대신 재일동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가 자리를 차지했다. 단박에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은 열 살 연하의 새 여인은 28년간 안방을 사수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사후 공개된 영상에는 김정일과 함께 군부대를 방문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가 드러난다. 균형추는 고용희의 2남1녀 쪽으로 일찌감치 기울어졌다. 호르몬계 질환을 앓는 형 정철이 밀려나자 막내 김정은이 부상했고 최종 낙점을 받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게임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후계 권력을 장악한 김정은은 2009년 봄 이복형이자 한때 경쟁자이던 김정남의 평양 근거지 우암각 별장을 습격해 완전 거세를 시도했다. 마카오와 홍콩 등을 오가며 살던 김정남은 분개했고, 둘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골이 패었다. 김정은은 중국과 오스트리아에서 김정남 암살을 시도했으나 해당국 공안당국에 의해 저지된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김정남이 김정은에게 “후계 자격이 없다”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버림받은 성혜림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러시아에서 쓸쓸히 숨졌다. 시신은 모스크바 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유선암 치료를 받다 파리에서 사망한 고용희의 시신이 전용기에 실려 평양에 안장된 것과 대비된다. 두 여인의 대립과 반감은 고스란히 아들에게 전이됐다.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남(제네바)과 이복 형제인 정철·정은(베른)은 평양에서도 한 차례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차단됐다.

이런 형국은 김정일이 이복동생 김평일에게 가했던 차별과 응징보다 지독하다. 어릴 적 생모를 잃은 김정일은 후계자 시절부터 계모 김성애와 그 소생들을 박대했다. 하지만 생명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이복 여동생 김경진은 오스트리아에, 김평일은 동유럽권 대사로 해외에 머물도록 했다. 김정남 암살에 이어 그 아들까지 겨눈 김정은과는 차이가 난다. 4년 전 고모부 장성택을 ‘반(反)국가 혐의’로 잔혹하게 처형한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권력승계 사례는 30차례 가까이 된다. 권력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정한 경우도 10여 회에 이른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들·손자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다. 국제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지만 북한은 “혁명위업 계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 세계적 모범을 창조했다”(김일성종합대 학보, 2016년 4호)고 강변한다. 그러나 국호(國號)에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봉건적 행태는 숨길 수 없다.

북한은 국부(國富)가 군주와 그 가족에게 속해 있다고 여기는 가산제(patrimonialism) 국가체제 성격을 띤다. 자원에 대한 독점과 인민 동원체제가 거친 형태로 표출되고 세습된다. 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를 이은 집착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하다. 3대 세습을 통해 절대권력을 장악한 김정은은 핵무장으로 국제사회를 겁박하고, 한반도와 민족의 운명을 농단하고 있다. 김소월이 노래한 약산의 진달래꽃은 영변 원자로 때문에 빛이 바랬다. 원산 명사십리의 모래톱은 대남 기습타격의 선봉인 북한군 장사정포의 화염에 덮였다. 세습 혈통의 정당화를 위해 차용한 백두산은 잇따른 핵실험 여파로 붕괴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 됐다.

한때 대남선동의 기치로 떠받들던 ‘우리 민족끼리’ 구호는 슬그머니 내려졌다. 북한 최고지도자는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는 멸절(滅絕)의 저주까지 쏟아낸다. 서울 핵 불바다 위협은 세습권력이 부리는 오만의 극치다. 그런데도 우리 집권세력과 지도층에선 대북 비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 권력을 두둔하거나 ‘체제의 특수성’ 운운하며 감싸고 든다.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 운동에 청춘을 바쳤다고 자부해 온 이들이 유독 북한 앞에선 꼬리를 내리는 건 수수께끼다.

봉건왕조가 원칙으로 삼아 온 장자승계(長子承繼)대로라면 김일성-김정일-김정남-김한솔이 순리다. 이런 구도가 탐탁할 리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믿을 건 내 핏줄뿐’이란 생각에 마음이 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세 자녀는 모두 여섯 살 이하다. 지난달 초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여동생 김여정을 정치국 후보위원에 앉혔지만 불안감 해소엔 역부족이다. 김정은이 조카 김한솔을 눈엣가시로 여겨 제거하려 드는 것도 이런 연유일 공산이 크다. 중국이 김정은 대안세력으로 김한솔을 내세우려고 보호 중이란 관측까지 나오면서 신경이 더 곤두섰을 수 있다.

불귀의 객이 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이런 아들·손자를 어떤 심정으로 지켜볼지 궁금해진다. 분명한 건 이 같은 골육상쟁이 세습제의 업보란 점이다. 평양판 ‘카인과 아벨’이라 불릴 만한 형제의 난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도 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김정은에 대한 김한솔의 원한은 다른 것으로 풀리기 어렵다. 사태를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온 듯하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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