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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시대’의 독해 "우리는 아직도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건 아닌가?"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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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의 답답함이 저러하옵니다. 군신이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로울 터인데, 의(義)를 세운다고 이(利)를 버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김상헌이 말했다.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도 아니 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 옵니다.

최명길이 또 입을 열었다.

웃으면서 곡을 할 줄 알아야...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이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고, 신하들은 산성으로 쫓겨가서도 그렇게 서로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중국인, 공산당과 시장경제와 어울린다는 것 보여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서유럽 진출도 꾀해 #반면 한국, 명분(義)과 실익(利) 사이 오가며 갈팡질팡

38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대륙을 본다.

시진핑의 당대회 보고에도 냉기는 흐른다. 세계와의 협력 화해를 얘기했지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건 오히려 띄엄띄엄 있는 강국에 대한 결의다. 비수의 일단처럼 비친다.

"건국 100주년(2049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실현하겠다", "세계는 중국의 이익에 손해되는 쓴 열매를 삼킬 거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강군흥국(强軍興國)의 국방체계를 만들겠다"...한마디로 '중국은 2050년 정도쯤 미국을 능가하는 강국이 될 것이다'라는 얘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셔터스톡]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셔터스톡]

연설은 치밀하다. '15년 후에는 모두 잘 살고, 30여 년 후에는 미국을 능가하는 강국이 될 것'이라며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중화민족의 부흥'을 외치며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해 민의를 빨아들이고 있다. 반부패, 토지사용권 연장, 법치 등 일반 인민들의 마음을 사는 단어가 연설 곳곳에 박혀있다.

지나친 권력 집중에 국민이 반발할 거라고? 노(no), 많은 중국인들을 인터뷰한 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중국인들 대다수는 시진핑 독주를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보다 자유주의 사조가 짙었던 후진타오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본다. 부패만 키운 시기라는 생각이다. 보다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진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건 기득권을 잃은 관료 집단 또는 그 아류일 뿐 대세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시진핑은, 지금의 집권세력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를 말이다. 분명한 것은 더욱더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힘은 강성해지고 있는데 반해 서방(미국)은 하향 길로 접어들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2049년 미국을 능가하는 강국이 될 것'이라는 말을 거부감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파이낸셜타임스의 국제문제 칼럼니스트인 기온 라크만은 10월 24일 신문에서 '서방에 대한 중국의 과감한 도전이 시작됐다(China's bold challenge to the West)'라고 썼다.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는 한때 중국 젊은이들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의 일당독재가 현실에 더 부합한다'라고 믿기 시작했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이후 서방 시스템에 대한 회의론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대신 중국 시스템, 차이나 모델에 대한 예찬이 늘어난다. 현 체제 중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

그동안 서방을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힘을 쏟았다면 앞으로는 중국 식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확대시키겠다는 게 시 총서기 연설의 중요 포인트다. 미-중 간 게임인 신형대국관계가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신형국제관계 컨셉이 이번 연설에서 제기됐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서방 전문가들은 '공산당 권위주의 체제가 자유 시장경제와 어울릴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우리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지금 중국에서 불고 있는 인터넷 모바일 혁명이 이를 말해준다. 중국은 어느 나라보다 모바일 페이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전자상거래가 보편화되고 있다. 드론이 뜨고, AI 논문이 쏟아지고, IoT 혁신이 일어난다. 경제는 6%대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민영 부문이 활활 타오른 덕택이다. 공산당 일당 체제에서도 민간에서는 활발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혁신은 실리콘밸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게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물론 중국의 혁신은 미국의 혁신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려 한다. 그러나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서쪽으로 포위망을 벗어나고 있다. 지금 약 20개 중국 도시가 서유럽과 직접 연결되는 철도를 갖고 있다. 청두에서 프라하, 우한에서 리용으로, 이우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식이다. 유럽은 더욱더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다. 독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중국이다.

미국도 유라시아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접근은 매우 현실적이다. 경제, 즉 돈을 갖고 이 지역 국가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차이나 스탠더드가 유라시아에서 서방 룰에 도전하고 있다.

기온 라크만의 말대로 서방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시작됐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바람이다. 우리가 알던 말랑말랑하고 호락호락하던 중국은 더 이상 없다. 대륙 전체가 지금 시진핑의 '강한 나라 만들기' 구호로 들썩인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다.

우리는 어떤가? 아직도 우리 외교는 명분(義)과 실익(利)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륙에서 불고 있는 저 거센 바람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전략적인 사고는 있는 것인가?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소설 속 최명길의 말대로 '웃으면서도 곡할 줄 아는' 유연한 전략이 과연 있는 것인가?
소설 '남한산성'은 삼전도를 이렇게 추억한다.

조선 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은 구층 단 위의 황색 일산을 향해 읍했다.  정명수가 계단을 내려와 칸의 말을 조선 왕에 전했다.

내 앞으로 나오니 어여쁘다. 지난 일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너와 더불어 앞 일을 말하고자 한다.

조선 왕이 말했다.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그때 청의 사령이 목을 빼어 길에 소리쳤다.

일 배요!

대륙에서 새로운 힘이 꿈틀거리고, 그 힘이 점점 외부로 치뻗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중국은 향후 15년, 30년 갈 길을 정해놓고 그 페이스대로 가고 있건만, 우리는 추상적인 비전마저 없지 않는가?

우리는 혹 아직도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차이나랩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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