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0세 은자의 풍류서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강창원 선생 100세 기념 서예전에 출품된 작품들. 김시습의 ‘사청사우(乍晴乍雨)-행초서’. [사진 김병기]

강창원 선생 100세 기념 서예전에 출품된 작품들. 김시습의 ‘사청사우(乍晴乍雨)-행초서’. [사진 김병기]

소나무 아래서 동자승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선 어디에 계시느냐고. 동자승이 답한다. “약초 캐러 가셨는데, 이 산 속에 계시는 건 분명하지만 구름이 깊어 어디 계신 줄 모르겠어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은자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여’라는 시의 내용이다. 평생을 이 시를 즐겨 쓰며 벗할 은자를 찾았던 ‘도인(道人)’이 100세 나이에 서울에 나타났다. 고령이라 친행하지 못하고 분신인 서예작품만 인사동의 희수갤러리에 빼곡하게 들어섰다.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姜昌元) 선생의 100세 기념 서예전이다.

소지도인 강창원 기념 서예전 #LA 거주 하며 서예 속 은거 #욕심 없는 글씨, 격조 가득 #내일까지 인사동서 열려

소지도인은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살면서 집에 드나들던 개혁사상가 양계초, 화가 제백석, 문학가 호적 등을 가까이서 보면서 성장했고 서예 스승 양소준(楊昭儁)과 인연도 이때 맺었다. 북경사범대학 중문과 졸업, 유창한 중국어, 격조 높은 고문, 문·사·철에 박통, 일휘경인의 서예… 소지도인의 경력이다. 광복한 조국에 돌아온 그는 검여 유희강,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청명 임창순, 연민 이가원 등과 함께 서예활동을 하다가 1977년 홀연히 LA로 이민을 떠났다. 그후, 강창원은 도시의 은자가 되어 평생을 서예로 살았다.

강창원 선생은 1997년부터 미국 LA에 은거하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중앙포토]

강창원 선생은 1997년부터 미국 LA에 은거하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중앙포토]

대은(大隱)은 시은(市隱)이라고 한다. 진정한 은자는 도시에 살면서도 오히려 산속에 사는 사람보다 더 세속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LA라는 대도시에 살면서도 서예 속으로 은거한 소지도인은 중국 송나라 때의 명필 황정견이 그랬듯이 아무 종이라도 생기면 글씨를 쓰고 종이가 다하면 멈췄다. 공졸을 따질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품평 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각종이에도 쓰고 큰 종이에도 쓰고 포장지에도 쓰고 종이상자의 깨끗한 면에 쓰기도 했다. 알거나(知之) 좋아하는(好之) 단계를 넘어 즐기는(樂之) 사람이 되어 글씨를 썼다. 글씨에 욕심이 들어있을 리 없다. 억지가 자리할 리 없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스스로 그러한 대로 그렇게 글씨가 이루어졌다. 최치원 선생이 말한 현묘한 도(道), ‘풍류(風流)’의 경지에 이른 글씨이다.

세로는 30cm, 가로는 고작 7~8cm밖에 안 되는 조각 종에 쓴 작품임에도 어느 큰 글씨도 당할 수 없는 큰 기상이 충만해 있다. 소소밀밀(疏疏密密)! 바늘 하나도 들기 어렵고 바람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가 하면 말이 질주할 것 같은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격조 높은 서권기와 문자향이 흐른다. 단지 머리 안에 쌓여있는 적전(積典)의 책에서 나오는 기와 향이 아니라, 육화한 화전(化典)의 책, 즉 ‘독서파만권(讀書破萬卷)’의 ‘破(독파)’에서 생성되어 ‘하필여입신(下筆如入神)’의 표현을 통해 나오는 서권기와 문자향이다. 입신 즉 귀신들린 경지의 글씨라서 기상이 일렁이면서도 결코 요란하지 않다. 부동심과 평탄지기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잘 쓰기 위해 결코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소지도인은 98세, 99세 그리고 100세에도 스스로 그러하게 놓아두는 ‘일임자연(一任自然)’의 서예를 하며 장수를 누리고 있다.

박인로의 ‘대승음(戴勝吟)’. [사진 김병기]

박인로의 ‘대승음(戴勝吟)’. [사진 김병기]

어머니가 그립지 않은 사람이 뉘 있으랴! LA시은의 서예가 소지도인도 모국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 조선, 대한민국 … 모국의 이름을 수없이 썼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바른 나라가 되기를 김시습, 이순신, 박인로 등 선현의 시를 쓰면서 빌었다. “뻐꾹새가 자꾸 낮잠을 깨우네. 너는 어찌 촌사람한테만 일하라고 뻐꾹대느냐? 서울 대갓집 지붕마루에서 울어 밭갈이 권하는 새가 있음을 알게 해야지!” 소지도인이 즐겨 쓴 박인로의 시이다. 도인의 우국애민정신과 풍자의식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동파는 말했다. 양의(良醫)는 과(科)를 나누지 않고 무슨 병이나 다 잘 고치듯이 훌륭한 서예가는 어느 체든 한 가지 이치로 깨달은 법을 통해 고격을 이룬다고. 소지도인의 글씨야말로 법으로부터 시작하여 파법을 거쳐 다시 위대한 격으로 승화한 글씨이다.

안타까울 손, 현재 한국 서단에는 소지도인의 이러한 고격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결코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애써 ‘작업’을 하는 서예가 만연할 뿐 스스로 그러하도록 자연에 맡기는 풍류서예를 만나기 어렵고, 독파만권의 서권기, 촌철살인의 풍자를 담은 ‘글 그릇’을 가진 서예가가 드물기에 소지도인의 고격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소지도인의 100세 기념 서예전이 내일까지 열린다. 서둘러 찾아가 봐야 할 것이다.

김병기(서예가, 서예평론가, 전북대 중문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