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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 타이포그래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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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호 14면

일본의 도로글자. ‘속도를 줄이시오’라는 뜻이다.

일본의 도로글자. ‘속도를 줄이시오’라는 뜻이다.

“상대성이론 타이포그래피…?”

유지원의 글자 풍경

“하하, 큰일나요!”

과학자의 반응이었다. 내가 마포구민으로서 수혜로 여기는 점은,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이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는 과학자들과의 접촉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박물관 앞 ‘맛보치킨’은 한국형 과학문화 살롱의 역할을 한다. 독일 대학에 다니던 시절, 철학 교수님은 학교 앞 복사집을 가리켜 ‘학문의 중심지(Wissenschaftszentrum)’라고 웃으며 불렀다.

맛보치킨도 그런 곳이다. 소통의 교차로라고 할까.

속도와 각도에 반응하는 글자

과학자들의 세계는 스케일이 크다. 가만 듣고 있으면 높은 산에 올라 확 트인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지구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스케일의 담론이 오고 가지만 말이다.

인류의 기술 문명은 고작 수백 년을 헤아린다. 글자 문명도 수천 년을 넘지 않는다. 칼 세이건은 “우리 시대의 과학 기술은 겨우 사춘기의 단계”라고 했다. 100년 단위의 역사 스케일로 보면 우리 시대가 노인처럼 여겨질 법도 한데, ‘사춘기’라고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미래가 고작 2100년이나 2500년대 아닌 수만 년대쯤으로 크게 펼쳐진다. 칼 세이건은 한술 더 떠 이런 질문을 한다. “역사가 100만 년이나 되는 기술 문명의 사회는 어떤 것일까?” 아득한 시간의 스케일이다.

한편, 우리 타이포그래퍼들은 일상에 밀착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글자들을 인간 신체의 편의와 제약에 최적화한다. 즉, 휴먼스케일에 반응한다.

일상 수준에서, 인간의 속도를 드라마틱하게 확장시킨 가장 가시적인 기계적 발명 중 하나로 자동차가 있다. 인간의 속도가 빛의 속도는 고사하고 고작 자동차의 속도만큼만 빨라져도, 그 결과로 생겨나는 글자에는 큰 변형이 가해진다. 자동차의 속도와 인간 시선의 각도에 반응한 도로 글자의 비례가 그 예다. 도로에 쓴 글자는 도로 위나 곁으로 세워진 글자에 비해, 운전자 시점과 속도에 의해 크게 왜곡된다.

일본의 도로글자와 시스템

일본 도로의 최고 속도 표시

일본 도로의 최고 속도 표시

일본에서 걸어다니다 보면, 도로나 주차장 노면에 페인트로 그려진 질서정연한 도로 글자들에 유독 눈이 간다. 한국에서도 도로교통법으로 도로 글자의 표준을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 도로교통법 규정의 세부가 훨씬 상세하다. 규정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눈으로 봐도 시공자들이 노면용 필기구의 폭과 그 배수 및 각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 수학적 구조의 질서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최고속도 제한 30을 표시하는 3의 디자인이 독특하다. 한 번은 30보다 40이 길어 보인 적이 있었다. 속도에 따라 비례가 달라지나? 확인해 보니 눈의 착각이었다. 위아래가 대칭이고 둥근 3보다 4가 날렵하고 방향성이 뚜렷해서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최고속도 제한이 30이든 40이든 세로 길이는 5m로 같다.

‘상대성이론 타이포그래피’라는 발상은 이때 떠올랐다. 도로 위 최고 속도 말고 적정 속도가 100 이상이 되면 그 속도에 대비해서 글자를 둘러싼 공간은 더 길게 왜곡되어야 하지 않을까? 속도가 빨라질 때, 글자의 모양은 얼마나 더 왜곡되어야 인간 인지에 최적화될까? 복잡한 변수 파악과 계산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공간 변형을 다룬다. 하지만 사실 이 도로글자 비례 왜곡은 운전자의 속도와 시점에 대비한 인간 인지를 보정한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 수준 교통 수단의 속력에서는 상대성이론의 효과가 미미하고, 광속에 근접해야 유효하다. 그래서 도로글자 타이포그래피가 ‘상대성이론 타이포그래피’이려면 앞서 과학자의 반응처럼 우리의 도로 상황에서는 큰일이 난다.

배려와 관리로 완결되는 공공디자인

한국과 일본의 일상 속 도로 표시 글자들. ‘멈추시오’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의 일상 속 도로 표시 글자들. ‘멈추시오’라는 뜻이다

일본 도로 글자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감탄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표준 디자인과 시스템의 측면을 넘어서, 칼같은 마감으로 작업에 임하는 시공자들의 마음가짐이다. 작업을 대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도로를 아름답게 만든다. 분필선으로 깨끗하게 밑그림을 제도한 흔적도 자주 보인다. 모서리는 말끔하게 각이 잡혀있다.

글자 너머로는 그 사회와 사람들이 보인다. 무명의 시공자들이 이렇게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배경에는 사회의 어떤 분위기가 있을까? 엄격한 내부 규율일까? 도시 미관과 시민들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일까? 정돈되고 꼼꼼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일까? 아무튼 작업자로서의 자부심과 그만한 보상 및 존중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저런 수준의 완결성에 도달하기 어려우리라 짐작됐다. 우리는 작업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하는 ‘인간’ 노동의 높은 질적 수준을 추구하고 그만큼 대우하는 데에 더 가치를 둘 필요가 있다.

그리 가공할 수준의 마감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물론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 글자들을 접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한 번은 한적한 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사진에서처럼 요란하고 시끄러운 도로 글자들을 본 적이 있다. 저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가공되지 않은 민낯 그대로의 초상이 아닐까? 앞에서 한 말이 미처 다 가시기도 전에 다음 말을 떠들고, 각자가 자기 말만 하느라 전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 이런 사회는 그 일원들에게 큰 피로감을 준다.

더구나 저 지역은 어린이를 보호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약자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구성원들의 자존감을 손상할 뿐 아니라, 어린이 보호라는 소기 목적을 상기하면 위험하기도 하다.

과학의 논리와 미학적 완결성 

“ ‘상대성이론 타이포그래피’같은 개념은 아무래도 포기해야겠죠? 과학의 원래 논리와 정합적으로 탁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미학적으로도 완결되지 않으니까요.”

이 말에, 한 과학자가 답했다. “왜요? 포기하지 말아요. 먼 미래에 인류가 광속으로 이동할 만큼 문명이 발달할 때, 그 궤도 위에 펼쳐질 부호들을 상상할 수 있잖아요.”

과연! 과학자들의 세계는 스케일이 크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광막한 우주를 질주해가는 미래의 풍경이 펼쳐졌다. 높은 산에 올라 바라보는 바다의 수평선보다 가없는 풍경이었다. 마음이 한없이 넉넉해졌다.

우리 한국어와 한글 공동체의 마음도 그렇게 넉넉해지면 좋겠다. 간판에서건 도로 위에서건 혼자 목청껏 소리치며 와글와글 떠들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경청하는 너그러움이 마음에 넉넉하게 지펴지면 좋겠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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