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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도박꾼? 사막에 564조 도시 세우는 'Mr. 에브리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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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현지시간) 세계 투자자들 앞에서 2G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을 비교하며 사우디의 변화와 미래를 예시하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사진 알아라비야 방송 캡처]

지난 24일(현지시간) 세계 투자자들 앞에서 2G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을 비교하며 사우디의 변화와 미래를 예시하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사진 알아라비야 방송 캡처]

개혁 설계자인가 정치 도박꾼인가 32세 사우디 왕세자에 쏠리는 눈  

지난 24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투자회의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투자자·관료·언론인의 눈이 단상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을 때 그가 흰색 아랍 전통옷의 주머니에서 두 대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한손엔 구형 2G폰을, 다른 한 손엔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 그가 말했다. “현재의 사우디와 우리가 열망하는 네옴(NEOM)의 차이는 이 두 휴대전화의 차이와 같습니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설명하듯, 사우디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비유로 설파한 이 남자는 무함마드 빈살만 빈압둘라지즈 알사우드 왕세자(32). 사우디아라비아 제1왕위계승자이자 역대 최연소 국방장관이다. 그가 소개한 네옴은 사우디가 홍해 인근 북서부 사막지대에 서울 44배 넓이(2만6500㎢)로 조성할 미래형 신도시다. 네옴이란 이름 자체가 새로움(new)을 뜻하는 라틴어(neo)와 미래라는 뜻의 아랍어 약자에서 왔다.

네옴 프로젝트엔 2025년까지 5000억 달러(약 564조원)가 투입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역대급 투자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네옴은 지난 6월 차기 국왕 1순위 계승자로 책봉된 무함마드의 미래 국가 비전을 함축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네옴은 석유가 아니라 바람과 태양 등 천혜자원 기반으로 조성된다”면서 “이곳은 관습적인 기업이 아니라 몽상가들(dreamers)을 위한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포스트 오일' 시대 청사진이다.

최대 산유국의 ‘포스트 오일’ 시대 이끄는 야심가

지난 4월 사우디아라비아 시내의 대형 광고판에 나란히 등장한 빈 나예프 왕세자, 살만 국왕, 무함마드 제2왕세자. 그 후 두달 뒤 살만 국왕은 제1 왕위 계승자로 무함마드를 전격 지명했다. [AP=연합뉴스]

지난 4월 사우디아라비아 시내의 대형 광고판에 나란히 등장한 빈 나예프 왕세자, 살만 국왕, 무함마드 제2왕세자. 그 후 두달 뒤 살만 국왕은 제1 왕위 계승자로 무함마드를 전격 지명했다. [A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현 살만 빈압둘라 알사우드 국왕의 장남이다. 긴 이름을 줄여서 MBS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지난 6월 그가 사촌 무함마드 빈나예프(58) 왕세자를 제치고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정됐을 때 세상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무함마드가 지난 2015년 제2왕세자로 지정됐을 때부터 빈나예프를 압도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킹 사우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무함마드는 2009년 리야드 주지사로 있던 아버지의 특별 고문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왕세제로서 차기 왕위 계승자였던 아버지 살만은 2015년 1월 배다른 형제 압둘라 국왕이 사망하자 권좌에 올랐다. 살만 국왕은 취임과 동시에 무함마드를 국방장관 겸 왕실법원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차근차근 권력 중심으로 접근해온 무함마드는 이미 맡고 있던 정무장관에도 유임됐다.

만 서른도 채 안돼 정무와 군사를 장악한 무함마드는 경제 쪽에서도 직함을 추가했다. 2015년 1월 말 최고경제위원회를 대체해 신설된 경제개발협의회 의장에 지명됐고 이어 4월엔 석유 왕국 사우디의 심장이라 할 국영석유회사 사우디 아람코의 회장에 올랐다. 제2왕세자로 책봉된 직후였다. 세상이 그를 권력 실세로, ‘미스터 에브리싱(Mr.Everything)’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무·군사·경제 차례로 장악, 강경외교 주도

지난 24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투자회의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총재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AP=연합뉴스]

지난 24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투자회의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총재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AP=연합뉴스]

2016년 초 영국 인디펜던트는 그 전해 말 독일의 대외정보기관인 연방정보국(BND)이 작성한 메모를 보도했다. “사우디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로 권력을 집중시켜 아랍 세계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보고서는 무함마드를 “정치적 도박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독일은 “연방정부 공식입장이 아니다”라며 부인했지만 미묘한 파장이 일었다.

BND의 우려는 무함마드가 예멘과 시리아에서 잇단 군사개입으로 지역 안정을 깨뜨리고 있다는 인식에서 초래됐다. 실제로 새파란 국방장관은 2015년 3월 아랍 연합군을 결성해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 정부군을 편들어 시아파 반군을 몰아낸답시고 무차별 공습을 퍼부어 숱한 민간인이 숨지기도 했다.

7년째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사태에서도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를 지원하는 이란과 각을 세우며 대치하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은 지난해 초 사우디가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 등 시아파 성직자 47명을 처형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 때 이란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등 강수를 둔 것도 무함마드의 입김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우디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중립적 중동정책을 추구했던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와 갈등 관계로 이어졌다. 2015년 말 살만 국왕과 오바마 대통령 회담에 참석한 무함마드는 전례를 깨고 발언 기회를 얻어 미국 외교 정책을 공개 비난하기까지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즈음 무함마드를 조명하면서 “사우디 매체는 그를 근면한 친기업적 지도자로 묘사하지만 일각에선 권력에 목 맨 나머지 급속한 변화도 서슴지 않는 인물로 본다”고 썼다.

 재정 긴축 강조하며 6000억원 호화요트 구매

실제로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가 말로는 사회 변혁을 내세우지만 실제 그럴 수 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의 시선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르내리는 게 호화요트 충동구매다.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세계 최고급 요트 세레네. 러시아 보드카 재벌 유리 셰플러 소유였다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자가 5억 유로(약 6250억 원)에 샀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세계 최고급 요트 세레네. 러시아 보드카 재벌 유리 셰플러 소유였다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자가 5억 유로(약 6250억 원)에 샀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해 무함마드는 프랑스 남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해안에서 440피트(약 132m) 길이의 요트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보좌관을 요트로 보내 주인을 알아보니 러시아의 보드카 재벌인 유리 셰플러 소유였다. 흥정 끝에 몇 시간 만에 타결된 가격은 약 5억 유로(약 6250억 원). '세레네'라는 이름의 이 호화요트는 이렇게 해서 하루 만에 주인이 바뀌었다.

무함마드를 포함, 사우디 왕실의 초호화 라이프스타일은 잘 알려진 바다. 문제는 당시 무함마드 본인이 주도한 긴축 재정이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2015년 사우디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6%에 달해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가장 높았다. 사우디 정부는 사상 첫 국채 발행, 공무원 상여금 삭감, 석유보조금 삭감 등을 통해 재정 건실화에 힘쓰고 있었다.

올 들어 사우디 정부는 공무원의 상여금을 원상회복시켰는데 이것이 무함마드의 왕세자 책봉에 앞서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 30년과 단절 선언 "극단주의 배척하겠다"

“지난 30여 년 간 벌어졌던 일은 사우디아라비아답지 않다. 30년간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중동답지 않은 것이다. 모든 종교와 전통,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인 온건한 이슬람 국가였던 우리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겠다."

지난 24일 네옴 발표 때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 같은 발언으로 세계를 또 한번 깜짝 놀라게 했다. 마치 ‘나라 바로 세우기’를 연상시키는 이 발언은 이제까지 나온 사우디의 개혁·개방 선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30년은 1979년 이란 혁명과 관계된다. 당시 이란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원리주의자들이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정일치체제를 수립하자 반작용으로 사우디에도 강경 수니파가 득세했다. 왕실은 이 종교 지도자들과 우호적 관계 속에 권좌를 유지했고 급속히 보수화하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영화관이 폐쇄되고 모르는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하는 게 금기시됐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극단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이 같은 관습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선언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여성의 운전을 내년 6월부터 허용한다는 정부 발표가 지난 9월 나왔다. 이제까지 여성에게 운전대를 잡는 걸 허용하지 않았던 악습을 철폐하는 것이다. 코미디쇼·프로레슬링 등 이벤트를 주최하는 엔터테인먼트 당국도 설립됐다. 전체 인구의 70%가 30대 이하인 젊은 사우디를 보편적 눈높이에 맞춰가겠다는 개혁 구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홍해 인근 북서부 사막지대에 서울 44배 넓이(2만6500㎢)로 조성할 미래형 신도시 네옴(NEOM)의 대략적 위치.

사우디아라비아가 홍해 인근 북서부 사막지대에 서울 44배 넓이(2만6500㎢)로 조성할 미래형 신도시 네옴(NEOM)의 대략적 위치.

변화의 결정체는 2016년 4월 발표한 비전 2030이다. 무함마드가 주도한 이 계획에선 사우디의 차기 15년을 밀고 갈 국가 전략 방향과 비전이 제시됐다. 무엇보다 국가경제에서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목표가 명확했다. 건설·관광·기술 등 다양한 산업을 도입하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야심이 구체화됐다.

네옴 계획은 이 비전 2030의 일부이자 화룡점정이다. 제2의 싱가포르 혹은 제2의 두바이로 불리는 네옴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가 만나는 경제 동맥에 위치하게 된다. 사우디 측은 “세계 인구 70%가 8시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교통 요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유 등 화석연료를 배제하고 풍력·태양광 등 천연(친환경) 에너지로 가동된다는 청사진도 공개됐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네옴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최고의 주거지와 사업 공간이 될 것”이라며 “사우디 정부의 기존 규제와 독립적으로 진행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꼴 되지 않겠다지만 재정 계획에 의구심도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A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AP=연합뉴스]

하지만 네옴 프로젝트를 비롯한 무함마드의 개혁 구상이 그대로 이뤄질지 미심쩍게 보는 시선이 많다. 수년째 계속돼 온 유가 하락에 따른 재정적자가 이 같은 비전을 몽상에 그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사우디는 2005년 1000억 달러를 들여 ‘킹 압둘라 금융특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계획은 10년째 크게 진전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투자 자금 조성 전망도 불투명하다. 사우디는 기업가치 약 2조 달러로 평가되는 아람코를 내년 하반기 중 사우디 증시와 해외증시에 동반 상장하고 지분의 최대 5%를 매각한다는 계획이다. 성사만 되면 세계 증시 사상 역대 최대규모 기업공개(IPO)에서 1000억 달러를 회수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사우디가 공개한 정보가 부실한 데다 상장 시도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며 계획이 “엉망(mess)”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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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변화를 못마땅해 하는 강경 보수파 성직자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개혁 개방을 통해 눈높이가 달라지는 젊은 시민들이 어디로 튈 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무함마드 왕세자가 그리는 미래가 '은둔의 왕국'이 아니란 건 분명하다. 지난 4월 무함마드는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사우디에 대한 문화적 영향이 없었다면 우리는 북한 꼴이 났을지 모릅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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