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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계획서 가족 서명 허용을” vs “대리 서명하면 법 취지 안 맞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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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3일 정부가 연명의료 중단 시범사업을 시작한 후 26일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하 의향서)는 150명이 작성했다. 반면에 연명의료계획서(이하 계획서)는 1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 다 연명의료 중단이 아니라 임종 과정에 접어들었을 때 인공호흡기 부착 등을 보류하는 데 주로 활용한다. 계획서 활용도가 낮으면 연명의료 보류가 고장 나게 된다.

연명의료 중단 시범사업 나흘째 #150명이 사전의향서 작성 #규제·벌칙 엄한 계획서는 단 1명

지난해 사망자 28만827명 중 교통사고·자살 등의 외인사를 제하고 병원에서 숨지는 사람이 약 2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3만 명은 연명의료를 하다 숨지고, 17만 명은 이런 걸 하지 않았다. 의향서·계획서 같은 제도가 없는데도 그렇다. 의료 현장에서 ‘심폐소생술 금지요청서(DNR)’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DNR은 법정 문서가 아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본격 시행되면 DNR 대신 의향서·계획서를 활용하게 된다. 그동안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같은 민간단체가 의향서 쓰기 운동을 하면서 약 30만 명이 작성했다. 이건 법적 효력이 없다. 의향서는 꽤 알려진 편이어서 작성자가 늘 것이다. 하지만 계획서는 크게 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서는 의사의 문서다. 환자의 뜻에 따라 의사가 최종 서명한다. 물론 환자도 서명한다. 말기 환자나 임종기 환자가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환자가 가족이 연명의료 유보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서울대병원이 2013년 114명의 말기 암 환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임종이 임박하면 호스피스로 갈 것이냐, 중환자실로 가서 연명의료를 할 것이냐’를 물었다. 17명은 가족이 대화를 거부했다. 대다수는 “호스피스 ‘호’자도 꺼내지 말라” “적극 치료할 생각을 해야지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발했다. 87명은 가족이 대화는 하되 환자와 연결하지 않았다. 14명의 환자와 의료진이 대화했고, 5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환자 9명(7.9%)만 대화했고,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의향이 있는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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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말기·임종기 환자와 가족이 연명의료 중단을 받아들이기가 아직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연명의료결정법이 본격 시행되면 의료현장에서는 처벌을 우려해 DNR을 활용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연명의료가 오히려 증가하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최혜진 세브란스병원 완화의료센터장도 “말기·임종기 환자한테 연명의료계획서를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며 “연명의료 유보의 절차가 복잡하고 관련 서류 등의 규제가 많고 벌칙이 강하다. DNR이 불법화되면 상당한 혼란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연명의료계획서에 환자 대신 가족이 서명할 수 있게 하거나 DNR로 대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국 상당수 주에서 보호자와 법정대리인의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허용한다. 위스콘신주의 경우 2012년 환자가 작성한 경우가 37%에 불과하다. 41%는 보호자가 작성했고 나머지는 보호자·환자가 상의한 뒤 서명은 보호자가 했다. 하지만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의 대표변호사는 “세브란스 김할머니 판결과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는 환자 결정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기 쉽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가족의 대리서명을 허용하면 법률 취지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보건복지부 박미라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자가 적고, DNR 활용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시범사업을 통해 접점을 찾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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