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변절자·숙주나물' 신숙주에 대한 오해하고 있는 것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신숙주는 큰 인물…변절자로만 매도해선 안 된다" 

신숙주 초상. 1445년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모시 채색, 비단 배접. 보물 613호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구봉영당에 봉안돼 있다. 가로·세로 110✕167㎝.

신숙주 초상. 1445년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모시 채색, 비단 배접. 보물 613호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구봉영당에 봉안돼 있다. 가로·세로 110✕167㎝.

조선 전기의 정치인 신숙주(1417~1475)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한글의 반포와 보급,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큰 인물이었지만 일반인의 뇌리에는 아직도 변절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삼촌, 세조를 섬겨서다. 특히 흥미를 위해서 사실도 저버리는 야사(野史)나 문학작품이 신숙주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껏 증폭시킨 듯하다. 남편 신숙주의 변절에 실망한 아내 윤씨가 남편을 꾸짖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참담하기까지 한 대목인데, 사실이 아니다. 그의 줏대 없음에 빗대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에서는 조롱의 기운이 읽힌다.

조선 전기 정치인 신숙주 탄생 600주년 학술대회 열려 재조명 #"흥미 위주의 문학작품이 그린 부정적 이미지가 실제로 고착돼" #훈민정음 반포, 대외 관계 등에서 활약 펼친 점 두루 살펴야

신숙주 한글창제사적비. 의정부시 문충공(신숙주) 묘정에 있다.

신숙주 한글창제사적비. 의정부시 문충공(신숙주) 묘정에 있다.

 이런 현실을 바꿔보려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27일 서울 서빙고로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다. 신숙주 탄생 600주년에 맞춰 고령신씨 대종회와 한글학회가 공동주최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이 후원하는 행사다.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신숙주의 전모를 살피는 학술대회다 보니 발표 주제 역시 다채롭다.
 훈민정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슬옹 세종학교육원 원장은 탁월한 언어학자였던 신숙주를 조명한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여전히 신비롭다. 세종대왕이 학자들의 도움 없이 직접 만들었다. 신숙주는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반포·보급 작업에 참가한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김 원장의 평가다. 박팽년·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썼고,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해 『홍무정운역훈』과 『동국정운』, 두 운서(韻書)의 편찬, 집필 작업을 주도했다.

신숙주가 집필한 일본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4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썼다.

신숙주가 집필한 일본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4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썼다.

 건국대 신병주 사학과 교수는 '조선초 격변기 신숙주의 정치적 역할'이라는 발표문에서 세종에서 성종까지 임금 6대에 걸쳐 왕조의 정치·문화 체제가 완성되는 시기의 신숙주의 역할을 살핀다. 세조 즉위 후 단종복위 움직임이 일자 단종의 사사(賜死)를 단호하게 요청하는가 하면 일부 가담자에 대해서는 선처를 호소했던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드러낸다.
 연세대 허경진 국문과 교수는 일본인들이 19세기 말까지 탐독했던 신숙주의 일본 견문록 『해동제국기』의 집필 과정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김경록 선임연구원은 신숙주의 지시로 전투와 화물 수송을 겸하는 조병선(漕兵船)이 건조된 사정을 소개한다. 1995년 『신숙주 평전』을 냈던 단국대 박덕규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신숙주에 대해 입체적인 접근방식의 필요성을 강조할 예정이다. 평전 증보판도 낸다. 서예가, 미술평론가로서의 신숙주도 조명된다. 모두 8개 분야의 주제 발표가 이뤄진다.

신숙주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필에 참여한 운서(韻書)인 『동국정운』의 서문. 이 서문을 신숙주가 썼기 때문에 책 집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숙주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필에 참여한 운서(韻書)인 『동국정운』의 서문. 이 서문을 신숙주가 썼기 때문에 책 집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숙주에 관한 오해와 속설도 다시 한 번 건드린다. 김슬옹 원장은 신숙주의 아내 윤씨가,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성삼문 등이 처형된 사육신 사건(1456년 6월)이 발생하기 5개월 전인 1456년 1월에 병사했다는 사실을 주제발표문에 포함시켰다. 이미 죽은 윤씨가 남편의 변절에 실망해 자살할 수는 없다.
 그런 허위사실은 어떻게 퍼지게 됐을까. 윤씨가 남편 때문에 자살했다고 묘사한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 박종화의 소설 '목매이는 여자' 등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인데, 이 작품들은 조선 중기의 문집 『송와잡기』와 그 내용을 받아들인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사서 『연려실기술』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런데 『송와잡기』의 저자 이기(李墍)는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의 후손이다. 때문에 왕을 바꿔가며 국정에 참여한 신숙주를 결코 호의적으로 그릴 수 없었을 거라는 게 박덕규 교수의 분석이다.
 김슬옹 원장은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을 제시한다. 신숙주가 녹두나물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나물 이름을 숙주나물이라 부르라고 명했다는 내용이다. 역시 확인할 길은 없는 얘기다.

 일반의 통념과 달리 신숙주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전향적이다. 재야사학자 이이화씨는 "신숙주가 정치적으로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뛰어난 학자였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했다. 명지대 한명기 사학과 교수는 "신숙주는 예외적으로 대외감각이 탁월했던 인물이었다"며 "특히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후 일본에게 당한 환란을 생각하면 당대에 찾아볼 수 없는 전략적 마인드와 국제감각을 갖췄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신숙주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