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15년 만에 성폭행 코치 처벌, 체육계 경종 울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현재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26·여)씨는 2016년 5월 전북 순창군에서 열린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를 잊을 수가 없다. 15년 동안 김 씨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 김모(39) 코치와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김 씨는 도망치듯 테니스장을 빠져나와 한참을 서서 울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15년 전의 아픔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김씨, 10세 때 테니스 코치에게 성폭행 당해 #지난 13일 1심에서 징역 10년형 '이례적 판결' #15년 동안 고통, 계속 코치생활 모습에 신고 #문체부·체육회에 도움 요청했지만 묵묵부답 #일기장·진료 자료·증인 찾아 자비로 소송 #김씨 "숨어있는 피해자들에게 희망 주고파"

<자료사진>

<자료사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테니스 선수로 활동한 김 씨는 10세였던 지난 2001년부터 이듬해까지 자신이 다니던 강원 철원군의 초등학교 테니스부 김모 코치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김 씨는 키가 1m68㎝나 정도로 신체 발달이 빠른 편이었다.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김 씨는 다른 선수들보다 코치의 지시를 잘 따랐다. 김 씨는 "코치님들은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종종 때렸다. 그게 무서워서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김 씨의 성격을 잘 아는 김 코치는 합숙훈련 기간 중 김 씨를 따로 불러 테니스장 라커룸, 관사 등에서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거다. 말하면 보복할 거다"라고 협박하며 성폭행했다. 김 씨는 음부에서 출혈이 나고 배가 아팠지만, 김 코치에게 맞거나 혼이 날까 봐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김 씨는 이게 '성폭행'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

 김 코치는 다른 테니스부원들의 몸을 더듬는 등 성추행을 일삼았다. 결국 다른 학부모에게 적발돼 김 코치는 학교에서 면직당했다. 김 씨는 김 코치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런데 거기서 피해는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김 코치가 자신을 성폭행하거나 흉기를 들고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김 코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손발이 떨렸다. 온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이성 간의 스킨십도 무서워했다.

어린시절 당한 성폭행으로 심신의 고통을 받은 김모씨가 2009년 자신의 심경을 일기장에 담았다. [사진 김모씨]

어린시절 당한 성폭행으로 심신의 고통을 받은 김모씨가 2009년 자신의 심경을 일기장에 담았다. [사진 김모씨]

 성인이 된 김 씨는 2010년 아동을 상대로 한 성폭력 범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그제야 자신도 아동 성폭행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2012년 성폭력 피해자 지킴이인 한국여성의전화와 각종 성폭력 상담소, 경찰서에 찾아가 피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수사기관에서는 이미 10년이 지난 사건이라 수사가 어렵다고 했다.

 김 씨는 아픈 경험을 잊고 좋은 테니스 코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체육학 공부에 전념해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틈틈히 주니어 선수들을 지도하며 꿈을 키웠다. 그런데 지난해 주니어 테니스 대회에서 중학교 지도자로 있는 김 코치를 만나면서 다시 악몽이 시작됐다. 김 씨는 "그 사람이 아직도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갑자기 테니스 코치가 되겠다는 꿈에 회의가 생겼다"고 털어놨다. 김 씨는 그날부터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김 씨는 다시 용기를 냈다. 김 씨는 한국여성의전화의 도움을 받아 고소장을 접수했다. 15년이나 지난 사건이라 증거자료를 모으는 게 어려웠지만, 김 씨는 어렸을 때 썼던 일기와 그간의 병원 진료 기록 등으로 신빙성을 높였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 대한테니스협회 등에도 수차례 신고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이후 약 1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지난 13일 춘천지법 원주지원 형사1부(부장판사 민지현)는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김 코치에게 징역 10년에 12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이번 사건을 맡은 지안나 국선변호사는 "검사가 10년을 구형했는데 그대로 10년형이 나온 건 이례적이다. 김 씨의 꼼꼼한 증거수집과 또렷한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코치는 1심 판결에 불복하고 17일 항소했다.

미성년 학생 선수를 코치가 성추행 하는 '체육계 도가니 사건'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에는 최근 5년간(2012~17) 성추행 및 성폭행에 대해 174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 중 절반인 87건(50%)의 징계가 주의 내지 경고, 근신 정도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조치는 언론으로 보도된 경우로 국한 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조은희 상담가는 "체육 지도자와 선수 간의 성폭행 신고는 전체 건수의 1%도 안 된다. 위계질서가 강한 체육계에서 성폭행을 당한 학생들이 선수 생활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신고하길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며 "성폭행 가해자가 10년형을 받은 건 굉장히 이례적이다. 보통 6~7년형을 받는 편이다. 그만큼 반성의 기미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김 씨는 "운동부 여성학생에게 권력을 휘두르며 성폭행까지 일삼는 지도자들의 행태를 묵과할 수 없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테니스협회 등으로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피해 선수들을 위한 실질적인 제도가 전무한 상태다. 이번 판결이 체육계에 일어나는 성폭행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