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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닫힌 드라마 - 열린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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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착실해 아버지 뜻대로 집안을 잘 돌봤지만 둘째는 그렇지 못했다. 하루는 둘째가 아버지를 졸랐다. “제게 물려주실 몫을 지금 주시면 도회지로 나가 한번 성공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고민 끝에 그렇게 해 줬다. 도회지로 간 둘째는 성공하기는커녕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걸인이 되어 돼지와 먹이를 다투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정신이 난 그는 고향 집을 생각했다. “집에선 하인도 배부르게 먹는다. 아들이라기에는 면목이 없으니 종으로 써 달라고 하자. 설마 내치지는 않겠지.” 먼발치에서 둘째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달려가 얼싸안자 거지꼴이 된 그가 말했다. “나는 아들이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종으로 써 주세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와 기쁘구나. 우리 잔치를 벌이자.”

음악·드라마는 닫힌 구조 많지만 삶은 열려 있어 #한 번의 큰 회심이 이후의 삶을 지켜주지 않는다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다. 화가들도 자주 그렸을 정도로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얘기는 기승전결의 닫힌 구조를 잘 보여 준다. 그 구조가 조성(調性) 음악의 구성 원리와 매우 비슷해 나는 강의에서 자주 이 비유를 예로 이용하곤 했다. 원래의 조성을 벗어나면서 생기는 긴장감, 그 정점에서 시작되는 회귀, 다시 돌아온 조성에서의 결말, 모두가 닮았다.

이렇듯 완결된 구조를 보면 나는 종종 그다음이 궁금해진다. 한 번의 극적인 마무리로 시간마저 멈춰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고향에 돌아온 뒤 둘째는 어떻게 살았을까”가 궁금하다. “그는 형처럼 착실하게 살아갔을까? 혹 방랑기가 발동해 또 집을 떠났을까?” 이 비유의 교훈을 생각하면 둘째가 다시 가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집에서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고 두고두고 착실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한 번의 극적인 일탈-귀향보다 더 어렵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첫째 아들 같은 사람이 더 많다. 둘째 아들 같은 경험은 주로 드라마에서 본다. 이에 비하면 평범한 삶은 대개 시시하고 쪼잔하다. 시작도 끝도 희미하고 하나의 정점도 없고 따라서 주제도 제목도 없다. 이런 삶을 그리는 음악은 없는 것일까? 일상처럼 느슨한, 열린 음악은 불가능한가?

대강의 계획만 세워 놓고 연주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는 음악을 시도한 존 케이지가 선구적이지만 그 연주에 시작과 끝이 있고 음악회장에서 연주된다면 완전히 열린 음악은 아닐 것이다. 작은 소재와 매우 적은 변화를 가지고 길게 음악을 풀어 가는 미니멀 음악도 떠오른다. 어쩌면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염불이 가장 열린 음악에 가까운 예이겠다. 염불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약간의 높낮이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일상과 흡사하다.

큰 일탈이 없다고 해서 우리 일상에 아무런 곡절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인간세에 없다. ‘탕자의 비유’의 후반이 그런 작은 곡절을 보여 준다.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를 보고 첫째가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아버지 옆에서 매일 수고하는 제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 내주지 않으시더니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시다니오.” 집을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마음에 아무 드라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 동생에 대한 복잡한 감정, 인내·하소연 등의 작은 드라마가 그의 말에서 읽힌다. 하기는 둘째 아들도 귀환 후 아무 기복 없이 살지는 않았으리라. 한 번의 회심에 의해 삶의 모든 곡절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므로. 한 번의 혁명이 그 이후의 나날을 보장해 주지 않듯이.

‘탕자의 비유’는 불평하는 첫째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의 말로써 끝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은 모두 네 것이 아니냐?” 완전한 귀향, 애초에 일탈도 드라마도 없는 세상의 얘기다. 이런 세상의 음악은 어떤 것일까?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