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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빨간 버스 공포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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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운전 중 버스를 보면 머리털이 쭈뼛 선다. 10여 년 전 추돌사고 경험 때문이다. 신호에 걸려 가만히 서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들이받혔다. 지하도에서 불쑥 나타나 멈추지 않고 달려오던 시내버스의 모습은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처럼비현실적이었다. 다행히 버스 운전자가 마지막 순간 브레이크를 밟아 대형사고는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에 받혀 본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버스가 주변에 나타나면 주의 깊게 움직임을 살피게 됐다.

예전엔 모든 버스가 난폭운전을 일삼았다. 서울 버스, 경기도 버스, 일반버스, 좌석버스가 똑같았다. 특권인 양 끼어들기를 일삼았고 작은 차가 알아서 비키라며 차로 급변경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엔 서울 시내버스가 그러는 일은 드물어졌다. 버스 준공영제 덕이다. 2004년 7월부터 서울시가 운송비를 제외한 적자분을 시내버스 회사에 전액 보전해 준다. 운전자는 1일 2교대, 1일 9시간, 주 5일 근무를 한다. 승객 태우기 경쟁과 초치기 운행을 하지 않아도 되니 버스가 한결 얌전해졌다. 준공영제 이후 버스 사고 건수는 60% 감소했고 승객들의 서비스 만족도는 35% 증가했다고 한다. 이럴 땐 연 2500억원씩 지원되는 세금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경기도 광역버스는 여전히 예외다. 몸체의 절반쯤을 빨간색으로 칠한 이 버스들은 도로의 무법자다. 출퇴근 시간이면 정류장에 서 있는 서울버스를 피해 전용차로를 밥 먹듯 벗어난다. 중앙차로에서 길가로 4~5개 차로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칼치기’도 서슴지 않는다. 때론 양옆에서 끼어드는 빨간 버스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빨간 버스 공포증’이 생길 지경이다.

다행히 경기도에서 광역버스에 대한 버스 준공영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체제로 만성 과로에 시달리는 경기도 운전사에겐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지난 7월 부부가 사망한 경부고속도로 참사 같은 일도 줄어들 테니 승객들도 이익이다. 다만 적지 않은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벌써 일반버스가 빠져 형평성에 어긋나고 일부 회사의 배만 불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과 경기도를 막론하고 모든 버스가 모범운전을 하고 시민들이 안전해질 날을 기다린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