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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믿음 없다” 4분 입장문 낭독 … 변호인과 사전 상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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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16일 구속 연장 후 처음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80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유영하 변호사 등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 7명은 이날 전원 사임계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뉴시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6일 구속 연장 후 처음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80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유영하 변호사 등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 7명은 이날 전원 사임계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뉴시스]

“헌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달 말부터 향후 시나리오 검토 #“정치 보복” 표현, 지지층 결집 노린듯 #유영하 “살기 찬 법정 홀로 남겨 둬” #재판부 “유죄 예단 갖고 있지 않아” #방청객 “날 사형시켜 달라” 소동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김세윤) 심리로 16일 열린 재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준비한 글을 읽었다. 재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재판부가 “(추가 구속과 관련해) 피고인 측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4분간 이어진 발언 내내 고개를 떨구고 글을 읽은 박 전 대통령은 딱 한 번 “부정 청탁을 들어준 사실이 없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들어 재판부 쪽을 바라봤다. 약 5개월간 80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입장을 직접 말한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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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은 이날 입장문을 변호인들과 상의해 작성했다고 한다. 검찰이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요청했던 지난달 26일 이후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함께 고민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한 변호인은 “향후 ‘시나리오’에 대해 박 전 대통령과 여러 가지 안을 두고 함께 검토했고 최종 결정은 박 전 대통령이 내렸다”고 말했다. 구속 결정이 내려진 뒤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에서 틈틈이 글을 썼다고 한다. 변호인단은 그 글을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또 다른 변호인은 “향후 박 전 대통령이 재판에 출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국선변호인도 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재판부는 두 차례나 “새로 영장을 발부한 것은 심리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이지 유죄라는 예단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영하 변호사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변론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변호인단) 모두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변호인단은 살기가 가득 찬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난다. 꼼수라는 비난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에 대한 비난은 저희가 감당하겠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외적인 고려 없이 영장 재발부를 결정했다. 새 변호인이나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경우 방대한 기록 때문에 피고인에게 피해가 돌아가니 사임 여부를 신중히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검찰 측도 “적법 절차에 따른 재판 진행을 이유로 변호인단이 사임한 것은 유감스럽다”며 “신속한 재판을 위해 피고인 측이 협조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재판 직후 “박 전 대통령이 향후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국선변호인 지정에도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박 전 대통령 재판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박 전 대통령 측은 지난 1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당시에도 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중대 결심을 할 수 있다”며 총사퇴를 암시한 바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고 판단한 변호인들이 사임이라는 승부수를 던져 돌파구를 찾으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은 지난 10일 구속 연장에 대한 청문 절차에서 “롯데·SK 뇌물 혐의 관련 심리는 충분히 이뤄져 다른 혐의로 구속하는 게 된다. 이는 별건 구속”이라고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경 지법의 한 판사는 “박 전 대통령 측이 불리한 상황으로 빠질수록 다른 카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이 ‘정치 보복’ ‘믿고 지지해 주는 분들’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을 놓고 법조계에서는 스스로를 ‘형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규정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친박계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망국의 길로 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이대로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흩어졌던 우파가 뭉쳐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돌리려고 한 것 같다”며 “정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무죄를 강조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방청객들이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사랑합니다” “힘내세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한 여성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사형시켜 달라”고 외치다가 급기야 탈진해 119구조대에 실려가기도 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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