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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공포로 과학을 파괴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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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40만 년 전 발견된 불은 오늘의 원자력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초기 인간이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불을 회피했다면 문명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문명은 위험을 통제하면서 발전해 왔다. 공포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위험의 회피가 아니라 과학의 진전이었다. 공포는 과학으로 극복한다. 공포가 과학을 파괴하도록 놔둬선 안 된다.

신고리 5, 6호 건설 ‘100일 중단’은 폭력 #공론화위, 원상 회복시켜 미래 준비해야

위험한 원자력 기술의 축적은 땅 좁고 자원 없어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인의 생존 수단이었다. 지난 60년 한국의 원전 기술은 국산화에 성공하고 단 한 번의 인명 사고 없이 안전·가격·가동률·공기(工期)에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성취했다.

이런 기술로 10여 년간 엄격한 심사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착공한 신고리 5, 6호기 원전이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강제로 건설을 중단시킨 건 일종의 폭력이었다. 공정이 30%나 진행됐으며 생돈 1조6000억원이 투입된 공사를 정부 훈령만으로 ‘일시 중지’시킨 것이다. 훗날 정권이 바뀌면 권력형 불법행위로 수사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100일이 다 되어 간다. 이 기간 중 과학이 멸시받고 산업이 무너지며 학문이 소멸하는 풍경이 매일같이 펼쳐졌다. 수출로 수십조원의 외화 획득, 수만 명의 일자리가 보장되는 미래 먹거리에 이 정부가 앞장서서 재를 뿌리는 일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자리 대통령’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어리둥절한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10조원 이상의 원전 수출 기회가 열렸지만 주무 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수출을 하려면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국적 불명의 해괴한 발언으로 딴죽만 걸고 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도 한국형 원전 수입을 검토하더니 우리의 탈원전 논란을 틈타 중국 원전이 도전장을 내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주 월요일에 입국해 신고리 2, 3호기를 시찰하고 돌아간 체코의 원전 특사단은 “엑설런트!”를 연발했다고 한다. “중국 원전은 지저분하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감추는 게 많다. 한국은 기술적 자신감이 충만해 속을 다 보여줬다.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들의 유일한 걱정은 “신고리 5, 6호기 건설이 중단돼 부품·시설·기술·인력 공급망 체계가 무너지면 한국 원전을 구매할 수 있겠나”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들 걱정을 불식시키기는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탈원전 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 죄를 어디서 씻으려나.

어제 종료된 2박3일의 공론화위 시민참여단 토론회 일부를 KTV 생방송으로 보니 내 판단엔 신고리 5, 6호기 ‘건설 계속’ 쪽이 ‘영구 중단’ 쪽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 시민참여단의 투표에도 이런 평가가 반영됐을 것이다. 건설 계속 쪽을 대표해 프레젠테이션을 한 원자력연구원 소속 임채영 박사가 “공포는 과학을 이길 수 없다”는 보편적 진실을 바탕으로 삼은 게 효과를 봤다. 반면에 영구 중단을 주장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이유진 연구기획위원은 “원자력은 파멸의 에너지” 같은 구호성 발언으로 폭넓은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어 보였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전문성과 절제로 무장된 건설 계속 쪽이 이념이 앞서 교조적인 느낌을 주는 영구 중단 쪽과 비교 됐다.

공론화위는 나흘 뒤인 20일 시민참여단 토론회를 바탕으로 건설 계속, 영구 중단 또는 제3의 권고안을 발표한다. 행여 정부 눈치, 여론 눈치를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평가 그대로, 투표 그대로 단순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제 온 나라가 신고리 5, 6호기 100일 건설 중단의 악몽에서 깨어날 때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