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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줄 서는 가게들, 간판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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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메뉴를 적어 놓은 널빤지 외에는 간판을 찾을 수 없는 익선동 ‘간판 없는 가게’. 간판을 달지 않았더니 오히려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사진 간판 없는 가게]

메뉴를 적어 놓은 널빤지 외에는 간판을 찾을 수 없는 익선동 ‘간판 없는 가게’. 간판을 달지 않았더니 오히려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사진 간판 없는 가게]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좁은 주택가 골목에 늘 줄이 길게 늘어서는 가게가 최근 생겼다. 지난 7월 말 청년 3명이 가정집을 직접 고쳐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집이다. 분명 식당 문은 열었는데 간판은커녕 가게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낡은 붉은 벽돌 담벼락에 ‘파스타, 피자, 와인, 맥주’란 글씨를 쓴 널빤지 한 장 놓은 게 전부다. 이런 콘셉트를 살려 식당 이름도 그냥 ‘간판 없는 가게’로 정했다. 간판이 없어 이름도 알 수 없는데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점심·저녁시간마다 늘 긴 대기 줄이 생긴다.

익선동 레스토랑, 신수동 빵집 … #SNS 영향, 간판·입지 덜 중요해져 #주택가 좁은 골목이라도 찾아와 #“주인과 취향 비슷한 고객이 대상 #물건·공간만으로 매장 표현 충분”

이처럼 간판을 아예 달지 않거나 달더라도 아주 작게 만들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놓는 매장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재밌는 건 간판이 없는데도 오히려 더 널리 알려진다는 점이다. 고객들이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이 숨겨진 공간을 기어이 찾아내니 말이다.

마포구 신수동 빵집 ‘오헨’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인기를 누리는 간판 없는 가게다. 창가에 높게 쌓아 놓은 식빵만이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를 짐작하게 할 뿐 이름이나 영업시간, 심지어 취급품목조차 써 있지 않다. 하루 종일 20~30대 젊은 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절반은 지나가다 호기심에 찾아오는 인근 거주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일부러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지난 12일 저녁 오헨에서 만난 이지은(24)씨는 “가게 분위기가 좋아 눈여겨보다가 어느 날 하루 용기를 내 들어와 봤다”며 “빵을 하나씩 진열해 놓은 방식이나 사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테이블과 의자가 주는 분위기가 좋아 이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들른다”고 말했다.

비단 ‘간판 없는 가게’나 ‘오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5월 압구정동에 문을 연 ‘아우어 베이커리’는 창문과 문에 새겨진 ‘아우어(OUR)’란 글씨 외에 간판은커녕 빵집이라는 표시도 없는데 ‘SNS 인증샷 성지’로 떠오르며 유명해졌다.

한남동 디저트 가게 ‘옹느세자메’는 간판 대신 명함 절반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에 이름과 영업시간을 적어 문 옆에 붙여 놓은 게 전부다. 박기대 사장은 “이름을 보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 지나가다 ‘한번 들어가 볼까’ 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길 원한다”며 “간판을 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 밖에도 가로수길 ‘겟썸커피’와 ‘논탄토’, 개봉동 케이크 가게 ‘이름 없는 가게’, 부산의 ‘간판 없는 김치찌개’ 등도 간판 없는 콘셉트로 인기다.

간판은 없지만 자판기나 냉장고 같은 상징물로 화제를 모은 곳도 있다. 마포구 망원동의 카페 ‘자판기’와 중구 광희동의 칵테일바 ‘장프리고’가 대표적이다. 카페 자판기는 회색 콘크리트 벽에 핑크 자판기 모양의 문을 달아 드나들게 했더니 특색 있는 가게가 몰려 있는 망원동에서도 금세 명소가 됐다. 장프리고 역시 과일가게처럼 꾸며진 간판 없는 작은 상점 안에 있는 커다란 업소용 냉장고 문을 열어야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숨겨져 있는 곳을 찾는 재미에 이 두 집 앞에는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왜 간판 없는 매장 시대가 된 것일까. 간판이 없는데 오히려 더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과거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가게를 운영했다면 지금은 주인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게를 연다”고 설명했다. 물건이나 공간만으로도 충분히 매장 성격을 드러내니 굳이 따로 간판을 달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SNS 영향도 크다. 어느 장소를 가든 미리 SNS를 통해 알고 찾아가는 시대이다 보니 간판 본연의 기능이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지금은 이미지 중심의 SNS를 통해 장소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고 그곳에 갈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김용섭 소장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SNS를 통해 간접 경험한 뒤 취향에 맞는 곳을 선택하다 보니 간판이나 목 좋은 입지는 더 이상 성공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고 말했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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