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사랑, 영원한 이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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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27면

CLASSIC COLUMN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멀리 있는 연인에게’. 베토벤과 동시대 화가 죠셉 슈틸러가 그린 여인 초상화를 재킷에 사용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멀리 있는 연인에게’. 베토벤과 동시대 화가 죠셉 슈틸러가 그린 여인 초상화를 재킷에 사용했다.

an die Musik: 베토벤 ‘멀리 있는 연인에게’ 

중국 동북지방의 열하(熱河)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은 승덕(承德)이라 불리는 열하는 연암 박지원의 문제작 『열하일기』의 무대가 된 곳이다. 연암은 정조 4년(1780) 팔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특별 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하는데, 귀국 후 3년에 걸쳐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나의 열하여행은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남북이 분단돼 여행은 압록강 건너 중국 단동에서 출발해 요양, 심양, 북경을 거쳐 만리장성 바깥의 열하까지 가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열하에서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을 때 현지 안내인 한핑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하는 여학생이었다. 불과 이틀간 우리 일행과 동행했지만 이제 헤어져야 한다고 아쉬워하며 중국 속담으로 인사말을 했다. “‘兩山 不可相接, 但 可相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산은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 바라볼 수는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보기는 어렵지만 서로 추억으로 간직해요.”

헛되이 ‘짜이찌엔’(再見, 다시 만나요)이라고 하지 않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사를 곱씹어 보니 슬픈 말이었다. 결국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산은 바라보며 그리워할 뿐 결코 만날 수 없다. 새삼 인생이란 짧은 만남과 영원한 이별의 연속이라는 깨달음이 가슴을 쳤다. 긴 여행의 막바지에서 나그네의 심사가 여려진 탓인지 시선은 차창 밖 열하의 풍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이별에 대한 사유가 끝없이 이어졌다.

 『열하일기』에도 이별론이 펼쳐진다. 박지원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북경에 도착했으나 황제는 만리장성 밖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 정사 박명원은 비상회의를 소집한다. “열하까지 700리길, 250명 전원이 갈 수는 없다. 인원 74명, 말은 55필로 줄여 5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린다.”

이렇게 되자 연암의 하인도 둘 중 하나는 북경에 남아야 했다. 머무는 장복과 떠나는 창대는 손을 맞잡고 슬피 운다. 콤비를 이뤄 상전을 모시고 천리 길을 왔는데 뜻밖에 헤어져야 하니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것처럼 슬픔이 복받치는 것이다. 연암은 눈물로 범벅이 된 하인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별에 대한 상념에 빠져든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 생이별보다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죽음으로 이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지으며 뒷일을 부탁함은 사람마다 똑같이 느끼는 순리다. 이런 이별의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의 괴로움보다 더하지 않다.’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생이별이 사별보다 괴롭다는 것이다. 베토벤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An die ferne Geliebte, op. 98)는 그런 이별을 그렸다. 누군지 분명치 않으나 베토벤의 생애에는 ‘불멸의 연인’이 있었다. 드러낼 수 없고, 마음껏 불태울 수도 없는 사랑이었다. 뜨거운 피가 식었을 법도 한 40대 중반의 베토벤은 20대 청년 의사 야이텔레스(Alois Isidor Jeitteles)의 시를 읽고 아팠던 사랑의 기억을 되살린다. 여섯 편의 시는 떠난 사랑에 대한 회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언덕 위에 앉아 나는, 바라본다. / 파랗고 안개 낀 대지를, / … / 거기서 나는 당신을, 연인이여, (처음)발견하였다. / (이제)나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 우리들 사이엔 산과 계곡들 / … / 아, 그 시선을 당신은 볼 수 없는가, / 열정적으로 당신을 찾는 그 시선을, / 나의 한숨은 흩날린다. / 우리를 나누는 공간 속에. / ….

여섯 개의 노랫말은 슈베르트의 연가곡과 달리 스토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베토벤은 노련한 작곡 기법으로 그것들이 물 흐르듯 이어지게 했다. 한 곡이 끝나도 피아노는 끊어질 듯 이어져 다음 곡을 맞이한다. 셋째 곡은 앞의 두 곡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카토 풍으로 뚜렷한 대비를 보여준다. 마지막 곡에는 첫 곡과 같은 선율을 사용해 수미일관하도록 했다. 이런 장치들로 여섯 곡은 15분 남짓한 하나의 곡으로 들린다.

내가 간혹 꺼내 듣는 음반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DG 음반이다. 음반가게를 하는 친구가 듣는 걸 보고 독특한 매력에 이끌려 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이 음반을 혼자서 듣는 모습엔 아득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가까이 있지만 볼 수 없는 그녀가 그에게도 있는지 모른다. 삶에서 인연은 번갯불처럼 짧고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못한다. 두 산처럼.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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