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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근대국가 아니다?…유럽, 왕권 내세워 근대국 도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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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10면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8> 왕정과 근대화 역설

대한제국 황제가 착용한 12류관. 12류관은 구슬을 꿴 끈이 12개 달린 면류관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왕조에서는 9류관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성로 경운박물관이 다양한 대한제국 황실 의복을 재현해 16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 [사진 경운박물관]

대한제국 황제가 착용한 12류관. 12류관은 구슬을 꿴 끈이 12개 달린 면류관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왕조에서는 9류관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성로 경운박물관이 다양한 대한제국 황실 의복을 재현해 16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 [사진 경운박물관]

1897년 10월 12일 서울에는 새벽부터 비가 오고 날씨도 쌀쌀했던 것 같다. 시민들은 옷이 젖고 추위에 떨었지만 국가의 경사를 맞아 얼굴에 즐거운 빛이 가득했다고 ‘독립신문’은 전하고 있다. 전날 밤부터 서울 시민들은 색등불을 집 앞에 달아 장안 길이 대낮처럼 밝았으며,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어 황제 즉위를 경축했다고 한다. 독립신문이 ‘친일파의 소굴’로 전락하기 이전이라 대한제국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英 빅토리아 여제, 獨 빌헬름1세… #유럽, 왕 내세워 근대 국가 형성 #귀족지배 철폐 ‘근대 계몽전제정’ #국민통합 이루고 국가 근대화 추진 #신분제 타파한 근대적 전제왕정은 #‘봉건 王政’과 다른 ‘新존왕주의’ #대한제국 창건도 같은 경로 밟아 #형식은 황제국이지만 내용은 民國 #근대적 왕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대한제국 평가 가로막는 주요 원인

지난 12일 창건 120주년을 맞았지만 많은 이의 기억 속에서 대한제국은 ‘잊힌 제국’이다. 대한제국이 한국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말하면 흔히 ‘황제의 전제정이 무슨 근대국가냐’라는 비아냥이 곧바로 따라붙곤 한다.

실제 대한제국은 전제정을 표방했다. 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를 통해서다. ‘국제’란 오늘날의 헌법을 가리킨다.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이 ‘국제’ 제1조에서 “대한국은 세계만방에 공인되어온 바 자주독립한 제국이다”고 규정했다. 제2조에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되었고 이후에도 만세불변할 전제정치다”고 명시했다.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황제권을 강화한 전제국가’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보수 반동’의 증거로 제시하곤 한다. 그런데 왕이나 황제가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전제국가는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왕 없을 땐 이웃나라에서 빌려오기도

세계사의 흐름은 왕정과 근대화가 모순 관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영국의 조지 3세 황제와 빅토리아 여제, 독일의 빌헬름 1세와 빌헬름 2세, 오스트리아의 요셉 1세와 카를 1세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왕이나 황제를 세워서 근대 민족국가를 만들어나갔다. 왕이 없을 땐 새로운 왕을 찾아내고 때론 이웃나라에서 빌려오기까지 했다. 스웨덴에서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 베르나도테를 초빙해 왕으로 삼았다. 근대화 초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영국·네덜란드·스페인·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룩셈부르크 등은 왕을 국가권위의 중심으로 섬기는 군주국이면서도 완전한 국민국가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38쪽)

‘전제정’을 표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전근대 봉건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계몽전제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선진 제국들과 대한제국을 비교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를 너무 비하해서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가 사보이왕을 전 이탈리아 왕으로 내세워 근대 민족국가를 창설한 것이 1860년이다. 독일제국에 황제가 들어서며 민족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1871년이다. 1897년의 대한제국 창건보다 시기적으로 그렇게 많이 앞선 것도 아니다. 그 시대의 보편적 흐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종에게 황제국 선포를 요청하는 상소문에는 그 같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세계의 제국들과 대등하게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라는 것이 ‘칭제 상소’의 주요 내용이었다.

‘근대적 전제정’은 대개 백성들에 의해 새로운 권위의 중심으로 요청되었다. 이 점이 고대의 군왕시대나 봉건시대의 절대왕정과 다른 점이다. 귀족들의 횡포나 종교적 이유 등 각종 원인으로 무력해진 국왕을 백성들이 다시 받들어 모시고 그 권위를 중심으로 귀족지배를 철폐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며 국가와 사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이 ‘근대 계몽전제정’의 모습이었다. 이 같은 근대적 왕정을 봉건적 왕정과 구별하기 위해 ‘신(新)존왕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331~362쪽)

대한제국 황제가 입었던 12장복 현의(玄衣). 12장복은 제례 때 입는 옷인 장복에 무늬(해·달·별·산·용·꿩 등)가 12개인 것을 가리킨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왕조에서는 9장복이었다. [사진 경운박물관]

대한제국 황제가 입었던 12장복 현의(玄衣). 12장복은 제례 때 입는 옷인 장복에 무늬(해·달·별·산·용·꿩 등)가 12개인 것을 가리킨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왕조에서는 9장복이었다. [사진 경운박물관]

근대사 키워드 ‘왕권 강화 vs 왕권 약화’

신존왕주의 혹은 근대 계몽전제정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그간 대한제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왕권을 제한하거나 약화시켜야만 근대화로 간주하는 잘못된 인식 혹은 ‘거대한 착각’이 현행 우리나라 교과서와 역사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신존왕주의는 근대사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 양상은 ‘왕권 강화 vs 왕권 약화’로 나타난다.

친일 개화파가 주도한 소위 ‘갑오개혁’(갑오경장·1894)의 궁극적 목표가 왕권 약화였다. 그에 앞서 역시 친일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1884)의 목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설립한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친일파의 소굴’로 뒤바뀌면서 민권을 강조하며 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 개화파의 목표는 일관되게 왕권 무력화였다. 일본 자신은 ‘왕권 강화’를 통해 근대화를 이뤄냈으면서 정작 우리에게는 ‘왕권 약화’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0년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펴내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도록 친일 개화파의 근대화 논리를 한 번도 제대로 비판해 본 적이 없이 그대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독립협회가 주도한 의회 개설 주장은 그 진상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구명되지 않은 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일본으로서는 이런 독립협회의 주장이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발전을 와해시켜 놓을 것을 기대하였고, 친일분자들은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집권을 노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종의 황제국 선포에 반대한 이들 가운데는 소수의 저명한 성리학 유학자들도 있었다. 최익현·유인석 등 위정척사파로 불리는 정통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에서는 고종과 뜻을 같이했다. 근왕세력과 함께 항일 의병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하지만 지향점이 달랐다. 근대화에 반대하며 주자학의 나라 조선을 복원하는 것이 위정척사파의 목표였다. 중국 황제를 존숭하는 이들에게 조선의 황제국 선포는 용납될 수 없었다. 고종은 친일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라는 양극단을 헤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군주권을 강화해 나갔다. 좋은 전통은 계승하고 서양의 근대적 문물까지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 대한제국의 창건 이념이었다.

‘국민적 합의’ 거쳐 대한제국 탄생

대한제국을 품고 정동을 누비다’를 주제로 열린 ‘정동야행’ 축제. 13일 오후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관람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제국을 품고 정동을 누비다’를 주제로 열린 ‘정동야행’ 축제. 13일 오후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관람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근대적 국민국가는 신분제 타파를 통해 이뤄진다. 대한제국은 양반 사대부를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소수의 성리학자의 반대와 친일 개화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이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탄생한 배경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황제를 칭하게 된 것은 “과신(戈臣·대신), 백성, 군오(軍伍), 시정(市井·상인)으로부터 칭제 요청을 받았다”(『고종실록』 1897년 10월 13일)고 천명했다. 관료와 일반 농민, 군대, 상인집단 등의 지지를 얻었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민적 합의’가 있었음으로 강조한 것이다.

고종은 1886년 사노비 세습제를 폐지한 데 이어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서얼이나 중인, 양민, 천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정부 요직에 두루 발탁했다.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덕수궁)에 배치되어 실질적으로 광무개혁을 주도한 인사들은 거의 미천한 서민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발탁인사는 정통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사회적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기존의 양반지배체제 아래서 정치 참여가 봉쇄됐던 소외 계층들에게 전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왕정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킴과 동시에 양반 사대부 중심의 관료체제와 신분제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서영희, ‘국가론적 측면에서 본 대한제국의 성격’,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73쪽)

대한제국에는 이미 ‘국민’이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찍이 대한제국은 법제상으로는 황제권이 강화된 황제국이었지만, 이념상으로는 ‘대한민국이었다’고 갈파한 바 있다.(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초판 1997, 전면개정판 2004·2014)

신분제 타파와 관료 등용 양상으로 보면 대한제국은 형식은 ‘황제국’이었지만 그 내용은 ‘민국’이었다는 얘기다. 대한제국 당시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정치집회에서는 실제로 ‘대한민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와 스위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흑백분리의 인종주의적 신분제를 법적으로 고수하고 있었다. 유럽까지 갈 것도 없이 대한제국은 적어도 명치유신을 통해 천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신격화하고 화족·사족·평민·천민의 4개 신분제를 만든 일본제국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백성의 나라(국민국가)’였다.

동학농민운동 속 신존왕주의

근대적 신존왕주의는 왕의 막강한 권력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백성이 약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해 왕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를 만드는 ‘근대화의 역설’이 여기에 존재한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지점도 바로 이 대목이다. 전봉준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의 각종 격문에는 왕에 대한 존중심이 깊이 표현돼 있다. “지금 우리 성상(聖上·고종)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백성에게 자애로우시며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약 아래로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 힘을 더하여 그 총명을 돕는다면 요(堯)·순(舜)의 덕화와 (한나라) 문제·경제의 치세를 가히 해를 보듯이 바랄 수 있을 것이다.”(동학농민군 ‘무장포고문’ 1894. 4. 27)

1970~80년대 우리 학계에 민중주의가 유행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각광을 받았다. 하층민중에 의한 혁명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뉴라이트 이론가인 유영익 전 한림대 교수가 98년 펴낸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일조각)은 이 같은 ‘진보적 해석’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출신성분과 각종 격문의 내용을 근거로 들면서 동학은 혁명적 민중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근대성보다는 오히려 유교적 질서를 옹호한 보수적 성격의 봉기였다는 것이다. 실제 전봉준과 김개남 등 동학의 지도자들은 지방의 유학자 출신이었고 동학의 포고문에서 존왕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전봉준은 체포된 후 재판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유로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을 내세웠다. 또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保國安民) 의기(義旗)를 들어 봉기했음을 천명하고 있다.

유영익 교수의 비판이 제기된 이후 동학농민운동을 근대적 혁명의 상징으로 강조하던 흐름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동학에서 보이는 왕에 대한 존중을 신존왕주의로 해석하지 못하고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존왕주의로 착각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착각은 동학의 보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그런 주장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모두 다 빠졌던 함정이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38쪽)

신존왕주의는 19세기 초부터 각종 민란을 거치며 형성되기 시작해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정조 임금이 승하한 1800년 이후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면서 왕권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계속되고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면서 민생이 피폐해졌다. 각종 민란이 19세기 초중반 속출했다. 정씨 왕조가 이씨 왕조를 대체하는 ‘역성혁명’을 바라는 『정감록』은 더욱 크게 유행했다. 민란을 일으킨 백성들은 처음에는 지방수령들에게 실망했고 그 다음에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온 고위 관리들에게 실망했다. 그들은 백성의 편이 아니라 자기들 이익을 채우면서 왕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달리 정부 관리들을 ‘권귀(權貴)’로 부르며 혹평하는 시각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다.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온갖 아부와 아양만을 일삼으며, 충성되이 옳은 말로 간하는 선비를 가리켜 요망한 말을 한다고 이를 물리치며 착하고 정직한 사람을 도리어 비도(匪徒)로 몰아세운다.”(동학농민군 ‘무장포고문’)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백성들 사이에 중간의 ‘권귀’들을 제치고 왕과 백성이 직통(直通)해 강화된 왕권으로 폐정을 개혁한다는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역성개벽(혁명)’이 아닌 ‘존왕개벽’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294~331쪽)

동학농민군이 표출한 신존왕주의는 1897년 5월 시작된 ‘칭체 상소’에도 반영되었다. 1897년 5월부터 그해 10월 12일 대한제국 창건까지 줄기차게 지속된 ‘칭제 상소’의 핵심적 내용이 신존왕주의를 표현한 것이었다. 칭제 상소문은 왕에 대한 존경으로 채워졌다. 실제 왕의 권력이 엄청나게 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권을 다시 세워야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이상 청계·2017),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19세기 후반 개화 개혁론의 구조와 전개-독립협회를 중심으로』(주진오·연세대 박사학위논문·1995),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서영희 외·푸른역사·2006), 『다시 찾는 우리 역사』(한영우·경세원·1997),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유영익·일조각·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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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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