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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멈춰 붓펜 쥐면 거기가 '박재동 작업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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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만화가 박재동의 거리 화실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커피숍 실외 탁자가 단골 자리 #오가는 사람들과 풍경 그려 #자칭 길거리 화가, 봇짐 아티스트 #4·3 항쟁 소재 애니메이션 완성 단계 #“역사화 분야 개척해 보고 싶다”

이 연재물의 열네 번째 주인공은 만화가 박재동(65)이다. 만화방 아들로 태어나 밥 먹듯 만화를 보고 그리던 청소년기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시사만화, 시사 애니메이션의 새 장을 열었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를 그리겠다는 ‘만인화(萬人畵)’를 꿈꾼다.


그림 안충기 기자-화가

그림 안충기 기자-화가

그는 작업실이 없다. 아니 도처에 있다. 어디나 그가 멈춰 서 수첩을 꺼내거나 붓펜을 쥐면 거기가 작업실이다. 지하철 좌석에 앉으면 수많은 모델이 계속 바꿔 가며 출연하는 근사한 화실이 펼쳐진다. 만화가 박재동(65)씨는 이런 자신을 길거리 화가, 봇짐 아티스트, 떠돌이 예술가라 불렀다. 유랑하는 화가의 발길은 광대하고 관심의 폭도 넓어서 아는 이들 사이에 그는 ‘오지라퍼’라 불린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오라면 다 가고, 해달라면 못하겠다는 소리를 못해요. 오죽하면 아내가 하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을 테니 조금씩만 하라 했겠어요. 남의 일 쫓아다니다 정작 제 앞가림은 못할까 싶어 걱정하는 소리지만 사람이 딱 제 마음처럼 못 살게 돼 있으니 그렇게 맺은 인연 속에서 흘러갈 뿐이죠.”

여러 가지 문제연구소장 뺨칠 그의 공식 직함은 여럿이다. 고향 일이라 맡았다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추진위원장, 교육현장의 미래를 위한 ‘꿈의 학교’ 운영위원장, 국정원의 개혁을 희망하는 ‘내 놔라 내 파일’ 시민운동 위원, ‘현실과 발언’ 동인 활동의 연장이라 할 ‘서울 민예총’ 회장…. 그는 손가락을 꼽으며 생각하다가 “다 내 원죄요” 했다.

길모퉁이 야외 커피숍의 단골 자리에 앉아 손바닥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재동 화가. 안충기 기자

길모퉁이 야외 커피숍의 단골 자리에 앉아 손바닥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재동 화가. 안충기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만평을 그리며 떠들어 댔으니 입을 싹 씻을 수도 없어요. 그 말에 책임을 지려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거죠. 근데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틈틈이 짬이 날 때 그리는 게 능률이 더 올라요. 조용하게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시끌시끌한 데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일하는 게 더 좋고.”

그는 한국 시사만화 역사에서 ‘한겨레 그림판’을 8년 동안 책임진 중요 시사만화가로 꼽힌다. 손바닥만 한 만평 하나로 대한민국의 아침을 들썩이게 했던 그의 날카롭고 신랄한 상황 인식은 독자 뇌리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화가로서 전시장에서 이뤄지는 미술행위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죠.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 사람에게 보여 주는 그림 말고 매일 전 국민에게 그림 한 점씩을 보여 주자는 생각이었어요. 99cm 네모 칸이 내겐 캔버스였던 셈입니다. 손바닥 그림이 그때 시작된 것이고.”

그는 요즘 집에서 5분 거리인 사육신묘 공원 건너편의 한 커피숍을 임시 작업실 삼고 있다. 반년 전부터 드나들었는데 실외 회랑에 있는 탁자가 그의 단골 자리다. 몇 년째 근거 삼았던 해묵은 다방이 없어지면서 새로 찾은 거리 화실인데 조용하고 햇빛이 잘 들어 일터로 안성맞춤이다. 거기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그리고, 사람도 만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을 매듭짓는다. 노량진 고시원 밀집 지역이라 오가는 이들이 대부분 청년이다. 운동복에 슬리퍼를 끌고 걸어가면서도 손에 든 수험서에 코를 박은 그들을 보며 화가는 “빛나는 젊음의 몇 년을 저렇게 보내야 할까 안타깝다”고 한숨 쉬었다.

“교육 문제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이죠. 그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과 ‘꿈의 예술학교’를 만들었어요. 내 연구실을 작업실 삼는 대신 그 일을 하는 후배들에게 내줬어요. 오전에 수업하고 오후에는 자유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예술가 교사를 원하는 학교에 보내 주는 사업인데 원하는 곳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 기분이 좋아요.”

그는 “멋진 화실을 만들고 자기 그림만 그리는 선후배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사회적 일을 하느라 자꾸 뒤로 밀려나는 개인적 꿈이 눈에 밟혀서다.

“1996년부터 준비해 온 제주 4·3 항쟁 소재 애니메이션 ‘오돌또기’는 이제 제작만 하면 되는 단계에 와 있어요. ‘박재동 프로덕션’이 가동할 준비가 끝났죠. 조그만 그림만 그리니까 거기에 만족하는 줄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벽화와 천장화를 보고 ‘나도 저 정도 크기는 그려야겠다’ 마음먹었던 사람이오. 어마어마하게 작은 것을 그렸으니 어마어마 큰 것도 그릴 겁니다. 역사화 분야를 개척해 보고 싶어요.”

그는 자칭 학자다. 말의 어원에 관심이 많아 ‘골방 언어학자’요, 만유인력의 새 법칙을 찾았다는 ‘골방 물리학자’다. 세상 모든 곳을 자신의 연구실이자 작업실로 둔갑시키는 그의 진정한 직업은 연금술사가 아닐까. 인생만화(人生萬花)를 꿈꾸는 그의 은발이 햇빛 아래서 금발로 반짝였다.


‘손바닥 그림’서 ‘사물 일기’로

지금 여기를 기록한다.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바로 제작한다. 박재동의 그림철학이자 길거리 화가의 숙명이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붓펜과 색색 볼펜으로 작은 수첩에 쓱 그린다. 이름하여 ‘손바닥 그림’이다. 2004년부터 그림일기 삼아 그렸으니 13년여 수천 점이 넘는 자료가 남았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찌라시 아트’다. 어릴 적부터 수집벽이 있었던 그는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전단이나 홍보물을 주워 모아 그 내용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국 사회 내부에 흐르는 욕망을 비춰 주는 그 찌라시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짜 증인이라는 생각이다.

요즘은 ‘찌라시 아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물 일기’에 빠져 있다. 마신 커피 종이컵, 다 쓴 두루마리 휴지 심, 옷 사이에 끼워진 포장지 등 생활사에 남을 다양한 물건에 그린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그것들이 다 사라지고 났을 때 그의 사물 일기 창고는 중요한 기록보관소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현고(現考) 예술가의 탄생이다.



박재동
1952년 경남 울주(현 울산)생.
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출발해 한겨레신문의 그림판을 맡으며 예리한 시선과 호쾌한 풍자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시사만화가. 기존 형식을 깬 과감한 시도로 ‘한국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술 교사를 지낸 뒤 만평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일하며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일구려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만화! 내 사랑』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등을 펴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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