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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숙의 Q] '고마워Yo'에 푹 빠져버린 대한민국 최초 여성 단독앵커, 신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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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KBS 메인뉴스 앵커를 하며 동시통역대학원을 마치고 돌연 영국으로 유학, 저널리즘 석·박사를 3년만에 취득했던 전설의 여성앵커 신은경. 그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작년 3월 KYWA(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고마워Yo' 캠페인으로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가을비 내리는 아침, 성곡미술관에서 '배양숙의 Q'가 신은경 이사장을 만났다.

1980년대 KBS 간판 앵커였던 신은경, 돌연 영국 유학 #최고의 자리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싶지 않아 공부 선택 #작년 3월 KYWA(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으로 취임 #'고마워Yo' 캠페인으로 전국에 감사의 기적 일으키고파

배양숙의 Q가 서울 종로 성곡미술관에서 신은경(전 KBS 아나운서, 한국청소년활동진흥회 이사장)을 만났다. 프리랜서 조현지

배양숙의 Q가 서울 종로 성곡미술관에서 신은경(전 KBS 아나운서, 한국청소년활동진흥회 이사장)을 만났다. 프리랜서 조현지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작년 3월 KYWA(Korea Youth Work Agency,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KYWA는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으로 청소년 정책을 실행하고 있어요. 청소년활동진흥법에 따라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과 역량개발을 지원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청소년은 학업과 입시에만 매달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똑같이 공부하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요. 장래에 대한 꿈도 없죠. 청소년은 놀 권리가 있고 놀 기회가 있어야 해요. 다양한 경험을 해야 본인의 재능과 적성을 알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는 ASEF(아시아-유럽 재단)가 개최하는 Young Leaders Summit에서 기조 연설을 했어요. 워낙 영어를 안 한지 오래돼서 자신도 없고 부끄러웠지만 연설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기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야 내년 벨기에에서 열리는 회의에 저희 기관 관계자들과 우리나라 청소년이 참석할 수 있거든요”
제2회 ASEF Young Leaders Summit에서 기조 연설 중인 모습. [사진 신은경]

제2회 ASEF Young Leaders Summit에서 기조 연설 중인 모습. [사진 신은경]

KYWA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전국에 국립청소년수련원 5곳을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충남 천안과 강원 평창에는 종합적인 체험 활동을 제공하는 수련원이 있어요. 그리고 전남 고흥에는 우주활동, 전북 김제에는 농업생명, 경북 영덕에는 해양환경을 테마로 한 특성화 체험센터가 있습니다. 만약 전남 고흥에 몇백명의 아이들이 견학 가서 그 중 일년에 3명만이라도 우주과학자의 꿈을 가진다면 의미가 있는 거죠.
이 외에도 30여개국의 청소년이 국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Dovol(Do volunteer)이라고 청소년의 편리하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어요. 또 청소년정책참여 프로그램도 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만든 정책을 정부에서 시행하기도 해요. 지난해 주제는 ‘틀림이 아닌 다름, 소수를 사수하라’ 였어요.
그리고 맞벌이나 조손 가정 아이들을 위한 국가 정책 사업 ‘방과후아카데미’가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공부방처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데, 저희는 민간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이 사업을 돕고 있어요. 프루덴셜생명은 경제교육을, CJ푸드빌은 착한빵 캠페인을 하고,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공연을 보여주는 식으로요. 방과후아카데미는 전국 200여개가 있고 약 9000명 아이들이 참가하고 있어요.”
KYWA를 새롭게 이끌어갈 신은경 이사장의 비전은 뭔가요?
”제가 작년 6월부터 ‘고마워Yo’라는 캠페인을 새로 시작했어요. OECD자료를 보니 한국 청소년이 공부를 제일 많이 하고 제일 잘하지만, 행복지수는 바닥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청소년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감사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고마워Yo’ 캠페인이에요. 처음에는 135개 기관과 함께 했는데 지금은 350개로 늘었어요. 그리고 어플도 만들었어요. 이를 통해 매일 3~5가지 감사를 일기를 쓰고 서로 소통할 수 있죠. 저는 감사란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 개개인을 행복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학교폭력도 예방할 수 있거든요. 최근 학교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잖아요. 특히 언어폭력이 무서운 거예요. 중앙대 부속 초등학교는 2013년부터 자체적으로 감사운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3년동안 학교폭력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79%에서 91%로 올랐대요. 비단 학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는 너무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고마워Yo’ 캠페인이 전국민적으로 확산됐으면 좋겠어요.”
신은경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이 9월 22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7년 공공부문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 인증 수여식에서 인증서를 받은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은경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이 9월 22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7년 공공부문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 인증 수여식에서 인증서를 받은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마워Yo’ 캠페인을 하면서 기억이 남는 사례가 있나요?
”청소년치료보호시설인 효광원에 직접 찾아가 고마워요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앞에 앉아있던 100여명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잠깐의 실수로 죄를 지었지만 스스로 나아지고 싶어 했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어요. 강의가 끝나고 열흘쯤 지났을 때 효광원에 있는 5명의 소년들로부터 긴 편지가 왔어요.

‘제게 행복과 자신감을 되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이사장님을 만나 얘기를 들으며 제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곳을 나가 앞으로 열심히 살면, 흙수저였던 제가 금수저로 바뀔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단정하게 글씨를 쓰며 자신의 속마음을 쓴 긴 편지를 보낼 줄 몰랐거든요. 고마워요 캠페인의 효과를 가슴 깊이 느낀 순간이었죠. 또 저는 감사의 기적이 우리 직장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출산을 한 여직원들에게 감사와 축하의 카드를 손수 써서 보내요. 그 편지가 귀한 아기 잘 키우고, 육아휴직 충분히 사용하고 돌아오라고, 우리는 당신을 기다린다는 무언의 안심이 되거든요. 최근에는 여성 간부들의 친정 부모님들께도 감사의 편지를 썼어요.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우리 조직의 유능한 인재로 일하고 있음을 감사 드린다고요. 그런데 편지를 받으신 어머니 한 분께서 제게 또 감사의 편지를 보내셨어요. 제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온 가족에게 자랑을 하셨다는 거예요.  편지를 받은 그날 저는 특강에서 그 어머니의 편지를 직접 읽었어요. 맨 앞에서 강의를 들으시던 청중 한 분이 눈물을 훔치시더군요. 감동은 또 감동을 낳고 그렇게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 시작은 감사고요.”

신은경 이사장이 여성 간부 친정 부모님들께 보낸 편지(사진 위)와 어머님들의 답장. [사진 신은경]

신은경 이사장이 여성 간부 친정 부모님들께 보낸 편지(사진 위)와 어머님들의 답장. [사진 신은경]

한국 최초 여성 단독앵커에서 현재는 KYWA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백수’시절이 있었다지요?
“대학졸업하고 보통 10~12월에 직장을 구하잖아요. 저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어요. 맨 처음 공고가 난 방송사 M본부에 지원했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제 생각엔 한 30초 읽은 것 같은데 그만 읽으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1차부터 떨어졌고, 제가 떨어진 이유가 뭔지 따지려고 광화문에 내렸어요. 그런데 가는 도중 ‘떨어트릴 만 해서 떨어트렸다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갔죠. 다음에는 긴 생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TBC에 지원했어요. 최종면접만을 앞둔 상황에서 방송통폐합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 꿈은 다시 한번 좌절됐죠. 그 때가 1980년 11월이었어요. 그 후로 공립학교 교사 시험을 성급히 치렀지만 낙방했고, 민간기업 비서실에도 지원했지만 회사가 합병되는 바람에 또 무산됐어요. 그렇게 11월부터 4월까지 5개월 동안 백수로 지내며 좌절의 시기를 겪었어요. 그러다 1981년 4월 25일 드디어 KBS공채가 떴습니다. 한 달 동안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르고 5월 25일 합격했어요. 누군가 저에게 ‘5달 뒤에 넌 KBS 붙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줬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겠죠. 하지만 당시 그 5개월은 제게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 안과 같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어두운 터널 끝에는 반드시 환한 빛이 있다는 거예요. 터널의 길이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저는 요즘 청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본인의 자리는 어딘가 꼭 한군데는 있으니 너무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나운서를 꿈꾸게 된 계기가 뭔가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자존감이 매우 낮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게 볼 것 같아서 일부러 까불고 그랬어요.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지내다 진명여고에 입학했는데, 수학점수를 40점을 받은 거예요. 너무 충격 받고 그 후로는 거의 공부를 놔버렸죠. 그러다 어느 날 이정숙 국어 선생님이 저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책을 읽었더니 ‘여러분 어때요? 정말 듣기 좋죠?’라며 칭찬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아나운서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셨어요. 그 말에 정말 감명받았어요. 사실 그 국어 선생님이 굉장히 무서우셨는데, 그 분이 저를 인정해 주셨다는 게 제 자존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렇게 아나운서를 꿈꾸게 됐고 KBS 9시 뉴스까지 맡게 됐죠. 사실 지금도 너무 힘들 때 꾸는 악몽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수학시험 치는 꿈, 하나는 9시 뉴스를 해야 하는데 8시 20분에 일어나는 꿈이에요. (웃음)”
국어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신은경씨의 삶을 바꿨네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아이를 야단치기보다는 칭찬을 많이 해야 해요. 잘한다, 한번 해봐라, 이런 말이 아이에게는 큰 힘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남동생한테 항상 ‘넌 클수록 점점 잘하는 구나.’하고 항상 칭찬하셨어요. 사실 제 남동생은 엄청 개구쟁이였거든요. 대학도 떨어졌고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항상 ‘넌 잘될 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결국 제 남동생은 현재 대기업의 중요 임원 자리까지 올라갔어요. 저희 어머니의 말씀이 제 남동생을 만든거죠. 제가 강의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수강생들의 눈빛을 보면 변화가 생긴 걸 알 수 있거든요. 저는 제 강의로 수많은 청중 가운데 단 한 명만이라도 설득할 수 있다면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요.”
신은경은 1980년대 KBS 간판 앵커였다. [사진 신은경]

신은경은 1980년대 KBS 간판 앵커였다. [사진 신은경]

아나운서로 합격해 9시 뉴스 앵커를 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합격 후 3개월 연수를 마치고 1981년 9월 첫 주에 처음으로 방송에 나갔어요. 이동방송차를 타고 남산에 올라가 5분 동안 시내스케치를 하는 거였죠. 보통 방송하고 들어오면 선배들이 평가를 하거든요. 근데 선배가 ‘신은경 왔어? 이리 좀 와봐.’라며 실장님 방으로 부르더군요. 제가 뭘 잘못했나 떨리는 마음으로 갔더니 9시 뉴스를 하라는 거예요. 아마 방송통폐합 후 개편하면서 당일까지 아나운서를 정하지 못했고, 차라리 신인을 내보내자고 결론이 난 것 같아요. 그렇게 7년간 주중 공동앵커로, 이후 5년동안은 주말 단독앵커로 진행했어요.”
최초의 여성 단독앵커로 여성앵커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저는 주중 앵커를 너무 오래해서 주말로 밀려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히려 여성 단독 앵커의 시대가 열렸다며 일본 요미우리신문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습니다.사실 저는 그렇게 혁신적이거나 용감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처음으로 많이 하게 됐어요. 여성 단독앵커도 그렇고 처음으로 컬러TV에 얼굴을 내비친 아나운서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뭔가를 ‘처음’ 한다는 건 항상 힘들어요. 저 역시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휴직을 선언한적이 있어요. 동시통역대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새벽 아침 4시간은 라디오, 저녁 4시간은 뉴스를 하면서 공부하라고 하더군요.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으니까 좋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커피를 마시면서도 잠을 잘 정도로 피곤했으니까요. 그렇게 2년을 겨우 공부해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석사를 졸업했어요. 그러면서 깨달은 건 인생은 계단처럼 발전한다는 거예요. 한 단계 발전하고 나면 또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시기가 오잖아요. 그 시기가 지나면 또 한 단계 올라갈 수 있고요. 중요한 건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 발전이 없는 그 시기를 잘 견뎌내는 거예요.”
KBS 간판 앵커에서 유학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뭔가요?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제가 뭔가를 더 하지 않으면 내리막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영국 웨일즈대학교 언론학 석·박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가 35살 즈음이었어요. 거의 전 국민한테 알리고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부담감도 컸습니다. 서른 넘어서 공부하러 가니 열심히 하겠다며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제 와서 무슨 공부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론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포기하고 돌아오면 ‘그럼 그렇지’라는 소리를 들을 까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신은경은 3년만에 영국 웨일즈대학교 언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리랜서 조현지

신은경은 3년만에 영국 웨일즈대학교 언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리랜서 조현지

어떻게 3년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나요?
“영국 웨일즈대학교 저널리즘센터에는 전세계의 중견언론인들이 모입니다.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 석사를 1년만에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해주거든요. 중견언론인에게 굳이 기초과정부터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50년 동안 다른 정치 시스템에서 변화된 남북한의 언어 이질화에 대한 연구’로 박사 논문을 썼어요.”
유학생활은 어땠나요?
“저희 어머니가 가서 라면만 먹고 살면 안 된다고 홍삼과 마를 갈아서 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먹거나 나머지는 제가 해먹었어요. 시간이 없으니 찐 야채와 삶은 스파게티 면을 냉동해놓고 그걸 소스와 함께 통에 담아서 들고 다녔어요. 미역국을 감자 넣고 푹 끓여서 먹기도 하고요. 저는 루이스 할머니가 계신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유고슬라비아 학생이 그 미역국을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요. 어떤 외국 학생은 제가 가지고 간 고추장볶음을 빵에 막 발라 먹기도 했고요. 루이스 할머니는 아침에 빙고게임을 즐기고 오후에는 장을 보고 5시에 저녁식사 후 티 한잔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TV와 뉴스를 보시는,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사시는 분이셨어요. 어느 날은 할머니께서 굉장히 아프셨어요. 그래서 제가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넣고 여러 가지 야채와 면을 볶은 요리를 만들어 드렸어요. 할머니께서 땀을 막 흘리면서 제 요리를 드신 후 다 나았다고 하신 게 아직도 기억나요.”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자료를 읽고 있는 배양숙. 프리랜서 조현지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자료를 읽고 있는 배양숙. 프리랜서 조현지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힘들 때면 수영장을 찾았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수영장을 돌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떤 생각이 딱 떠오를 때가 있거든요. 사실 500장짜리 논문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먼저 제목과 목차, 소제목까지 모두 쓰니까 꽤 여러 장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나서 감사의 말을 미리 썼어요.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이 논문을 쓰면서 터널 끝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요. 그렇게 500장 중 20여장을 먼저 쓰고 시작했어요. 논문을 다 쓰고 나면 평가 교수님들이 모여서 어떤 부분은 좋았고 어떤 부분은 부족한지 등을 알려주고 통과여부를 결정하는 디펜스 시간이 있어요. 열심히 쓴 논문이 통과 되고 밖으로 나갔는데 어느새 봄이 온 거예요. 전 사실 박사과정이 끝나면 환호하고 정말 신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했어요.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고요한 가운데 ‘끝났네.’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저에게 주어진 일보따리를 하나씩 해나갔죠.”
따님을 위한 편지를 준비해오셨다고요.

딸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아가가 어느새 자라 든든한 대학생이 되었구나. 엄마가 너의 어깨에 기댈 만큼 키가 크다니!
너에겐 항상 감사하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사랑하는 마음 더 많고 깊지만 그동안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에게 귀하고 영리한 딸로 이 세상에 와 주어서 고마워.

넌 어려서부터 “아빠, 엄마 사랑해요“ 라고 수없이 많은 편지에, 일기에, 그림일기에, 쓰고 그려주었단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엄마~” 라고 불러주었단다. 함께 걸어갈 때 엄마에게 어깨동무 해주고 등과 허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고. 엄마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었단다.

어려운 공부 잘 해내고, 동아리 활동, 행사, 합창등 활발하고 균형있게 대학생활 해 주어 기특하고 고맙다.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너의 삶의 태도 또한 고맙구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을 평생 하며 살기를 바라며 미리 감사한다. 자신있고 당당하게 삶을 개척해 나가길 응원한다. 너의 밝은 미래를 위해 역량을 개발하고, 공부하고 배운 것, 번 것은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이 주신 목적대로 사는 가정,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 기쁨을 나누는 가정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어떤 어려움에서도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않고 늘 Bright Side 에 서있기를 바란다. 남을 돕는 기회를 가지며 나누며 베풀며 살아라.

엄마가 나이 들어도 너와 마음을 열고 서로 이야기 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고, 엄마 아빠가 어떤 형태로든 너의 미래의 삶에 든든한 의지가 되어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너의 아름다운 이름을 세상에 남기는 선한 영향력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이 들면서도 더욱 기품있는 여성이 되길 바라며, 이 모든 것을 미리 보며 감사한다.

사랑한다. 내 딸아.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세상에는 커다란 나무도 있지만 작은 풀들도 있다. 당신이 큰 나무여도 좋겠지만 작은 풀이더라도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큰 나무와 작은 풀이 함께 이루는 게 세상이니까.’ 어렸던 제게 이 말이 너무 위안되고 힘이 됐어요. 보통 꿈을 가지라고 하면 너무 크게 생각하는데 그냥 작은 풀로 살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게 저희 세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세상에 태어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이세상에 흙수저 금수저는 없어요.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죠.”
성곡미술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은경 이사장(왼쪽)과 배양숙. 프리랜서 조현지

성곡미술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은경 이사장(왼쪽)과 배양숙. 프리랜서 조현지

'배양숙의 Q'가 신은경 이사장을 만나고자 했었던 이유는 최고의 커리어와 스펙을 쌓은 그가 한 사람의 아내가 되면서 모든 것을 접었던 '결심'과 '과정'이 궁금했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 청소년들을 잘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힘주어 얘기하던 신은경 이사장의 차분하지만 단단했던 목소리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멀고 높은 곳의 환한 별처럼 여겨졌었던 그는 마주할 수 있는 거리에서 더 환하고 따뜻한 별이 되어 조용히 사회를 빛내고 있었다. 

배양숙 (사)서울인문포럼 이사장 betterlife65@daum.net
정리 = 장하니 인턴기자 chang.hany@joongang.co.kr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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