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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전과족 늘어나는 서울공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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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서울대 공대는 야구로 치면 배트 짧게 잡고 번트(범용 연구) 쳐 1루 진출에 만족하는 타자였다. 그러나 학문 세계에선 만루홈런(독창적 개가)만 기억된다.’

비전과 사명감 흐릿해지는 공학도 #탈원전, 정책 리스크마저 얹어서야

『2015 서울대 공과대학 백서』가 이공계 최고학부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담았다면, 두어 달 뒤 나온 『축적의 시간』은 극복 의지와 그 밑그림에 해당한다. 전문 분야별로 내로라하는 공대 석학 26명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2년, 이번에는 서울대 공대 11개 전 학과 학생들이 연대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축적의 시간』 집필진 교수들에게 물어봤다.

엘리트 공학도들조차 미래를 불안해한다.
“서울공대에 근래 전과족(轉科族)이 늘어나는 게 심상찮다. 장래가 불투명한 몇몇 학과는 더 심해서 정원 40여 명 중 10% 이상이 다른 과로 옮기려고 한다. 대입 학원들까지 나서 합격선 낮은 비인기학과에 우선 입학해 전과하라는 잔꾀를 부추긴다. 인기 많던 서울대 공대 석사과정이 요즘 심심찮게 미달 사태다. 한 우물 파보겠다는 열정이 눈에 띄게 희박해지고 있다.”(김용환 조선해양학과장)

바늘구멍 같다는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포기한 학생은 올해 386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합격자 9명 중 1명꼴. 공대가 136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절반 이상이 복수 합격한 의과대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자력·에너지 분야 외에도 서울대 공대 전 학과가 탈원전 반대 성명에 가담했다.
“원전 줄이고 신재생 늘리는 게 대세라면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왜 정치 이슈화하나. 원전은 원자력공학만의 일이 아니다. 기계·화학·재료·물리·컴퓨터 같은 공학 주요 분야와 학제적이다. 전문가를 멀리하고, 해당 학문을 무시한 채 반세기 이상 멀쩡히 커 온 원자력이 새 정부 정책 한 방에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젊은 학생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밥그릇 싸움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다. 원전의 대체와 에너지 믹스야말로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주한규 원자핵공학과 교수)
외환위기 이후 또다시 이공계 위기다.
“요즘 중국 출장 다녀오면 가슴이 먹먹하다. 우리보다 열 배는 빨리 움직이고 인적투자·시설투자도 엄청나다. 서울대의 연구생태계와 교수 처우 갖고 해외 석학 영입은커녕, 있는 국내 교수조차 지키지 못한다. 천연자원 없는 나라에서 과학기술 말고 무엇으로 먹고사나. 새 정부가 소득 주도 성장에 이어 혁신성장을 강조한 건 다행스러운데 두고 볼 일이다.”(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 화학생물학부)

『축적의 시간』 발간을 주도한 이정동 산업공학과 교수의 진단은 신랄하기 짝이 없다. 괴수 출몰하는 액션영화 주인공의 식은땀 나는 악몽처럼, 그의 후속작 『축적의 길』에는 암울한 한국 산업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불황이다, 저성장 시대다 해서 잔업 밥 먹듯 하면서 죽어라 일하지만 두 다리는 흐르는 모래 속으로 점점 더 빨려들어 한걸음 나아가기 힘들 정도다. 산업 칸막이를 허무는 4차 산업혁명의 융합 기술혁신이, 뿔 끝에 횃불 단 코뿔소처럼 미친 듯 달려든다. 낡고 굼뜬 화물차인 줄 알았던 중국은 최신식 엔진으로 무장한 거대 트레일러가 되어 바짝 쫓아와 어서 길 비키라고 빵빵 댄다.”

무서운 게 어찌 중국과 4차 산업혁명뿐일까. 실패 경험까지 소중하게 쌓아 가야 한다는데, 이승만 대통령 이후 원자력 한국 ‘축적의 시간’ 60년을 스스로 허물어내리려 한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