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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퇴근 후 제2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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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놀지. 놀고 나니 더 피곤하네.” 수퍼 추석 연휴가 끝난 후 만난 한 50대 임원 A는 이렇게 털어놨다. 연휴를 잘 보내고 말겠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더 피곤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A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듯싶다. 과로에 익숙한 21세기 한국의 기성세대들이라면 꽤 공감할 만한 얘기 아닐까.

퇴근 후 카톡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 방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지만 실제로 정부와 정치권이 이를 밀어붙인다고 해도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데 한 표 던진다. 선언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일하는 문화의 뿌리부터 바꾸지 않으면 또 다른 편법만 난무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온 기성세대에겐 과로가 익숙하다. 30대 초반 직장인 B는 “이젠 부장님이 (카톡이 아니라) 전화로 직접 업무 지시를 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B는 취미로 춤을 배운다. 무용 콩쿠르에 참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열심이다. 춤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배우는 건 아니다. 우아하게 점프를 뛰고 현란한 턴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다. B에게 춤은 또 하나의 자아실현 수단이다. “직업은 생계 유지의 수단”이라며 “밥값은 하되 내 전체를 쏟아붓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철학이란다. 요즘 뜨는 말이 ‘퇴준생’(퇴사 준비생)이라지만 덜컥 퇴사를 하기엔 두렵고, 대신 택한 게 퇴근 후 제2의 삶인 셈이다.

B만 유별난 게 아니다. 저녁 무렵 한강 변엔 프로 수준으로 달리기를 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으며,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이나 손글씨 학원 등도 성업 중이다. 생업과는 일말의 관련성도 없는 제각각의 취미 생활에 탐닉하는 이가 늘어나는 추세다.

도쿄대 첫 재일 한국인 교수로 유명한 강상중 작가가 내놓은 신작의 일본어 원제는 『역경으로부터의 일 철학』인데, 한국 번역본 제목은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다. 강 교수는 최근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원제보다 좋은 제목”이라며 “이젠 한 가지에 나를 쏟아붓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카톡으로 업무지시를 하는데도 왜 눈치를 봐야 하냐며 혀를 찰 일이 아니다. 그 시간에 탱고나 목공예를 배워보면 어떨까. 과로하느라 내가 몰랐던 진정한 내가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