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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선각자 홍대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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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나의 벗 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수법에 대해 이미 듣고 왔다. 그럼에도 중국의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도인데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앞 대목이다. 연암은 담헌(湛軒) 홍대용(1731~83)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열하일기』에 담헌을 26차례나 등장시켰다.

홍대용은 18세기 실학파 선구자다. ‘청나라=오랑캐’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졌다. 1765년 숙부를 따라 연행(燕行·사신으로 중국 베이징에 다녀옴)에 동참한 게 전환점이 됐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중국 문물에 눈을 떴다. 중화(中華)와 오랑캐라는 이분법을 뛰어넘어 ‘모든 민족과 나라는 평등하다’고 깨달았다. 낡은 중화주의에 갇힌 조선의 각성을 촉구했다.

담헌은 조선에 지동설을 처음 소개했다. 자기 집에 각종 기기를 갖춘 천문대를 마련했고, 베이징에서 서양 과학자와 만나며 최신 정보를 구했다. “우주의 뭇별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空界)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썼다. 인간중심주의도 거부했다. 동식물을 중심으로 보면 사람이 더 천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에서 ‘홍대용 2017-경계없는 사유’ 전시가 열리고 있다. 추석 연휴에 현장을 다녀왔다. 홍대용의 삶을 되돌아본 설치·영상 작품이 나왔다. 과거와 현재를 미술로 연결한 지방 작은 박물관의 실험정신이 도드라진다. 출품 작가 넷은 지난 1년간 홍대용의 연행 길을 다녀왔고 여러 차례 워크숍도 열었다. 전시장은 좁았지만 250년 전 조선의 개혁을 부르짖은 담헌은 우렁차 보였다.

담헌이 중국에 간 건 명나라 멸망(1644) 이후 한 세기가 지난 다음이다.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인 병자호란(1636)보다 한참 뒤다. 그럼에도 조선에는 중화주의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철 지난 이념을 씻어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국도, 미국도 자국중심주의를 외치는 작금의 한반도. 핵만 붙들고 있는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홍대용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세상엔 불변의 중심이 없고, 우주 만물은 서로 어어졌는데 말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