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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에서 걷던 그 사람들, 그새 수원까지 갔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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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 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영국 미술가 줄리안 오피. 최근작 ‘워킹 인 해크니’(2017) 앞에 섰다. [이후남 기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 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영국 미술가 줄리안 오피. 최근작 ‘워킹 인 해크니’(2017) 앞에 섰다. [이후남 기자]

궁궐 옆 미술관 외벽에 걷고 또 걷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 바로 옆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얘기다. 벽면에 설치한 길이 24m의 LED패널 안에서 지칠 줄 모르고 걷는 사람들 모습은 영국 미술가 줄리안 오피(59)가 새로 만든 작품이자 미술관 안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전시작 중 하나다. 마치 만화처럼 단순한 선과 형태, 감각적인 색채의 걷는 사람들로 유명한 그는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 외벽에 선보였던 초대형 작품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제법 대중적 명성을 누려왔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주년 #영국 작가 줄리안 오피 작품전 #그림·LED영상·3D조각 약 80점 #“사람들 걷는 모습은 팔레트 같아 #거리에서 수백 장 촬영한 뒤 작업 #서울서 찍힌 90%가 스타일리시”

수원의 이 신생미술관이 개관 2주년과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마련한 이번 개인전은 그의 한층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규모 전시다. 그림과 LED영상, 3D조각,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작품 약 80점을 선보인다. 그 중 곳곳에서 포착한 걷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역시나 한눈에도 쉽고 경쾌하게 다가온다.

오피 특유의 걷는 사람들이 전시된 전시장 내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오피 특유의 걷는 사람들이 전시된 전시장 내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걷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흥미롭고 역동적이죠. 각기 다른 사람들의 걷는 모습은 마치 풍부한 색깔을 담고 있는 팔레트 같아요.” 수원에서 만난 줄리안 오피의 말이다. 걷는 사람들을 그는 옆모습으로, 눈코입 없이 동그란 얼굴로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얼굴보다는 차림이나 태도가 중요해요. 초상화는 보는 사람과 작가와 그려진 인물의 삼각관계인데 걷는 사람들은 작가도 보지 않고 보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도 않아요.”

그래서인지 그의 걷는 사람들은 옷차림이나 동작이 한결 도드라진다. 인물화가 아니라 인물을 통해 그려낸 풍경화 같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사진작가에 의뢰해 곳곳에서 찍은 수백 점 사진에 바탕한 실제 사람들 모습이기도 하다. “일정한 높이에서, 사진을 찍는 줄 모르게 찍어달라고 해요. 서울에서도 그렇게 찍었는데 90%의 인물이 스타일리시해서 놀랐어요. 아마도 날씨 등등의 이유로 쇼핑가에서 찍은 사진이라 그런 것 같아요.”

오피의 신작 ‘타워스.2’ (2017).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오피의 신작 ‘타워스.2’ (2017).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전시장에는 몇 해 전 서울 사당동 등에서 포착한 한국 사람들 사진에 바탕한 그림들도 자리했다. 독특하고 우아한 차림새의 ‘템플 우먼’ 같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살짝 배가 나온 ‘컴퍼니맨’도 있다. “제 선택은 민주적이에요. 잘 생기거나 권력있는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걷는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우아함이 있어요.” 그림만 아니라 수십장의 그림을 애니메이션처럼 연결해 만든 동영상 작품들도 재미있다. 그 자체로 움직이는 그림, 입체적인 그림이다.

물론 그가 늘 사람의 옆모습만 그리는 건 아니다. 영국 밴드 블러의 음반 표지처럼 정면을 두상 위주로 그린 그림들은 눈코입을 그리되 역시나 단순화한 묘사가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는 여러 정면 인물화를 배너로 선보이는 한편 인물의 두상 그림을 3D 프린터로 입체화한 작품들도 선보인다.

“저는 오랫동안 예술은 조각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제가 1980년대에 다닌 골드스미스 대학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영화도 학과가 나뉘지 않고 하나로 섞여 있었어요. 벽에 걸린 평평한 작품도 앞과 뒤를 고루 보는 것이 저에겐 익숙합니다.”

미술관 외벽에 길이 24m의 LED 패널을 설치해 선보이고 있는 오피의 작품 ‘피플’(2017).

미술관 외벽에 길이 24m의 LED 패널을 설치해 선보이고 있는 오피의 작품 ‘피플’(2017).

아예 인적이 없이 들판 같은 전원풍경이나 터널 같은 도시 풍경을 담은 작품들도 선보인다. 그는 “풍경만으로 전시를 할 생각은 못했는데 80여 점이나 선보이는 전시라서 가능했다”고 전했다. 특히 전시장 한 곳은 양떼를 설치물로 만들고 움직이는 물고기를 LED패널로 선보이는 등 인공의 감각으로 전원을 입체화한 듯 꾸몄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인물을 그렸던 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신문에 실린 자신의 전시 비평에서 ‘사람이 없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 계기란다. “사람들은 그림의 대상을, 아기를 그렸는지 고양이를 그렸는지를 보지만 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양한 요리 재료와 같아요. 작품의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죠.” 작품의 영감을 어디서 얻는 지 질문이 나왔을 때는 무척 익숙한 질문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온갖 곳에서 얻을 수 있죠, 정확히는 몰라요. 쇼핑하러 갔다가 사람들 움직임이 춤추는 듯 느껴질 때, 햇볕 아래 놀다가 새들이 날아오르는 걸 볼 때 … .”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21일까지. 관람료 성인 기준 4000원.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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