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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모든 것을 걸고 쓰고 찍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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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남한산성’(10월 3일 개봉)은 황동혁(46)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무척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미국 입양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돌아본 ‘마이 파더’(2007)로 데뷔했고, 청각 장애 아동 성폭행 사건 실화를 영화화해 법 개정까지 끌어낸 ‘도가니’(2011)를 거쳐, 발랄하고 대중적인 복고 로맨스 ‘수상한 그녀’(2014)로 860만 흥행 축포를 터트렸다. 온기 가득한 드라마와 잘 어울릴 것 같은 황 감독이 처절하고 비장했던 역사를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했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 병자호란 배경이다. 청의 공격으로 남한산성에 숨어든 인조(박해일)와 대신들은 47일을 버티며 청과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황 감독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든 장수처럼 이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지금 자신의 최고작을 손에 쥔 감독을 만났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한산성' 촬영현장

'남한산성' 촬영현장

━영화를 보고 나서 색깔이 너무 달라 황 감독 영화가 맞나 싶었다.
“사람들이 ‘다중이’ 아니냐고 그러는데, 나도 가끔 내가 이상하다(웃음). 내게 인간적인 지점과 차갑고 서늘한 지점이 둘 다 있는데, 나이 들면서 차갑고 서늘한 영화, 건조하지만 그 안에 끓는 지점이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더라.
근래에 봤던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 드니 빌뇌브 감독)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데이비드 맥킨지 감독)처럼 황량한데 그 안에 시대와 지역, 사람이 세밀하게 엮여 있고 그 사이에서 마찰음이 들리는 영화 말이다. 메말랐지만 그 안에 슬픔이나 물기가 느껴지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전작들과 연결 고리를 찾기 어려웠다.
“사실 전작들은 ‘후회 없이 완벽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마이 파더’는 데뷔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다. ‘도가니’는 이 사건을 다시 공론화시키는 데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수상한 그녀’는 영화관에 한 번도 못 가본 70~80대 노인까지도 손주와 재밌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남한산성’은 유일하게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내가 꿈꿨던 ‘이상적인 영화’에 도전한 것이다. 그래서 달라 보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패배와 치욕의 역사다. 인조는 결국 청에 무릎을 꿇는다. 지는 싸움엔 카타르시스가 없다. 제작비(150억원)가 많이 들어간 상업영화인데 제작에 어려움은 없었나.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이야기에 끌렸다. 소설 속 성 안과 밖의 풍경 묘사에 끌렸고, 그 안에서 망하는 나라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나누었던 대사에 매료됐다. 처절하고 슬픈데 아름다움이 있었다. 비애미·비장미랄까. 얼어붙은 조선의 산하, 눈 쌓인 성벽이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그걸 자꾸 영화로 옮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간 내가 쌓은 경험과 성공으로 얻은 모든 신뢰를 걸고 투자한다고 생각했다. 그 어려운 ‘도가니’를 성공시켰던 사람인데 한 번은 믿어주겠지. 모두 잃어도 상관 없었다. 올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걸고 쓰고 찍었다.
신기하게도 투자배급사(CJ E&M)에서 실로 몇 년 만에 만장일치로 투자 결정을 했다고 하더라. 나에 대한 신뢰도 있겠지만, 원작과 시나리오의 힘, 배우들에 대한 신뢰가 컸다. 하나라도 미비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남한산성' 촬영현장

'남한산성' 촬영현장

━원작의 대사나 내용 뿐만 아니라 김훈 특유의 힘 있는 문체나 냉정한 정조까지 영화에 옮겼더라. 김훈 작가가 만족해 했을 것 같다.
“보고 되게 좋아하셨다고 하더라. 원작의 시적이면서 철학이 담긴 대사를 정말 좋아해서 거의 그대로 살렸다. 풍경 묘사도 카메라의 움직임을 주지 않고 기교 없이 스트레이트한 방식으로 찍었다. 대신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숏을 극단적으로 교차했다. 넓고 관조적인 풍경과 인물의 표정을 가깝게 들여다보는 접사를 직접 붙였는데 그 충돌에서 오는 힘이 김훈 작가의 문장과 비슷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영화는 척화(斥和)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主和)파 최명길(이병헌)의 논쟁이 중심이다. 감독은 어느 편인가.
“이성적으론 최명길 편이다. 당시 조선군의 지리멸렬한 상황을 보면 싸워서는 안됐다. 더 버텼기 때문에 오히려 강화도가 무너지면서 많은 백성이 죽었다. 그런데 감정적으론 김상헌에게 더 끌린다. 그가 겪는 번민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자주적으로 청을 막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치 우리가 6.25 전쟁을 미국의 도움없이 이겨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듯이. 그래서 김상헌이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는 장면을 넣었다. 근왕병이 봉화를 올리고 산골을 하얗게 빛내며 달려오는 장면을.”

'남한산성' 촬영현장. 황동혁 감독과 이병헌.

'남한산성' 촬영현장. 황동혁 감독과 이병헌.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과시하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구 하나 과장하지 않고 절제하며 안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 김상헌과 최명길의 50:50의 균형도 돋보였다.
“혼자 튀어서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베테랑 배우들이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그 균형을 맞추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누구 한 쪽이 맞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배우들이 알아서 밸런스 조절을 잘 해줬다. 구조 자체가 김상헌과 최명길의 배틀이지만, 마주보고 하는게 아니라 왕을 보고 하는 배틀이다. 좁은 공간에서 항상 자세를 숙이고 있어 자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배틀 장면에서 특별히 주문한 게 있었나.
“사실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연기하는게 배우들에겐 낯선 경험이다. 특히 김윤석 배우는 처음 사극을 하기 때문에 더 낯설었을 것이다. 자꾸 얼굴을 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 한 방을 날릴 때까지 누르고 가자고 했다.”

━원작이 있지만 감독만의 오리지널리티도 고민했을 것 같다.
“실제 역사와 소설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어디까지 나의 창작을 넣을지 고민이 많았다. 가장 공들인 장면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마지막 대화다. 이별하는 장면인데 순수한 내 상상의 산물이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그 대화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제일 보수적이던 김상헌이 47일간의 논쟁 끝에 가장 급진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바로 이 대사.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말이오. 그것이 이 성 안에서 내가 깨달은 것이오.’
“옛날에 운동권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극좌였던 선배가 가장 극우로 튀어 버리더라. 극과 극은 연결된다고 생각해왔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김상헌은 정말 ‘숭명반청(崇明反 淸)’ 밖에 모르는 ‘꼰대’였을까 의문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면 훨씬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단순히 ‘숭명반청’ 때문이 아니라, 근왕병이 조직을 갖추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합리적 근거와 자신감을 가지고 척화를 주장했다고 말한다.
원작에도 있지만 그는 왕이 항복하자 곡기를 끊고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 그 정도라면 분명 마지막에 어떤 깨달음이 있지 않았을까. 특히 김상헌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 기복이 큰 인물이다. 처음에 사공을 베는 원죄를 저지르고 산성에 들어온다. 사공의 손녀 나루(조아인)를 만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천민인 날쇠(고수)와 교류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마지막엔 날쇠에게 먼저 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김상헌이라면 끝에 가장 혁명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상상과 바람이 들어간 장면이고, 사실 이 영화의 마무리다.”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그 장면에 다 있는 것 같았다.
“맞다. 인조가 환궁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최명길이 한 번 돌아보지 않나. 그게 김상헌이 있는 남한산성 쪽을 보며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서린 표정으로.”

━그런데 왜 자살에 실패했던 원작과는 달리 영화 속 김상헌은 칼로 자살하나.
“척화파 정훈의 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실제 칼로 자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평생 산에 들어가서 살았다. 김상헌은 사공을 칼로 베었다. 원죄를 속죄하려했다면 그 칼에 의해 자살을 시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김상헌을 죽인 것은 아니고 자살을 시도했던 감정까지 그리고 싶었다. 김윤석 배우에게 칼을 뽑으며 사공의 대사, ‘저는 제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를 머릿속에 떠올려달라고 얘기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말의 대결도 흥미로웠지만, 궁의 안과 밖, 고관대작과 백성의 삶을 균형적으로 다룬 것도 좋았다. 결국 관료들의 무지한 현실 인식이 백성을 위기에 빠트렸다.
“어쨌든 그들은 고위 관리고 애민 정신이나 애국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땅에 발붙이고 사는 날쇠 같은 백성에게 닿기는 너무 멀다. 하지만 말싸움의 결과가 당장 전투로 이어지고, 백성의 당면 사건으로 닥치게 된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

━진지한 영화지만 곳곳에 해학이 있다. 특히 그 절박한 와중에 인조는 동방의 예를 보여준다면 신년에 칸에게 소와 음식을 보내지 않나. 최명길이 칸에게 거절 당하고 나서 왕에게 고하는데, 궁 밖에는 돌아온 소가 무심하게 여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이들에게 ‘소 풀 뜯는 소리 하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웃음).
“하하.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실패의 상징으로 소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소를 찍는데 되새김질을 하더라. 너무 웃겼다. 그 위에 대제학의 ‘전~하!’라는 비명이 얹어지면서 더 코믹하게 보였다. 묘한 대비가 있어서 살려 봤다(웃음).”

'남한산성'

'남한산성'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은,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 곤란을 겪고 있는 지금의 한국 현실과 무척 닮았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사드 문제부터 북핵 문제까지 불거지더라.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강대국 사이 갈등이 도드라지고, 한국은 광해처럼 등거리 외교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한반도의 운명이란 놀랍게도 반복된다. 분명 ‘남한산성’ 속 인물들의 행동에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꺼리가 많다. 예컨대 대사로 넣진 않았지만, 최명길이 수어사 이시백(박희순)과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있다. 최명길이 ‘당신은 어느 쪽인가’ 묻자 이시백은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장수일 뿐이오’라고 말한다. 최명길은 속으로 ‘당신 같은 장수가 20~30명만 더 있었다면 조선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또 날쇠처럼 맡은 바 자기 자리에서 꿋꿋이 사는 민초들의 모습도 배울 점이 있다.”

━황 감독의 다음 작품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남한산성’으로 하얗게 불태워서 재만 남았다. 불씨가 언제 다시 피어날지 모르겠다(웃음). 올해는 쉬면서 재충전 하려고 한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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