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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민이 주인 되게 헌법 개정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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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공동대표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공동대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촛불에 의한 새 정부 탄생을 언급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정부를 수립한 것은 국민의 승리로 보인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국가(권력자)와 국민이 괴리되고 둘 사이에 파괴적 갈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고, 국가 운영 전반의 틀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도약하려면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는 헌법 개정이 필수적인 이유다.

안보 이유로 국민 자유·권리 제한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어 #10차 개헌은 국민이 주체 되게 #평등권·사회권 대폭 강화해야

노르웨이의 에이빈 스미스 오슬로대 법대 교수는 “민주주의는 헌법이 국민의 것일 때 비로소 그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가 원하는 우리 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는 헌법에 쓰인 정부의 통치구조, 정치·행정제도와 절차가 국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 헌법은 정치의 도구일 뿐 국민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헌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권은 국민 주권을 지키기 위한 국가와 국민 간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헌법 조문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권력구조와 관련한 헌법 조문들도 무엇이 국민의 기본권 수호에 가장 적합한가 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현행 헌법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 문제는 과거 권위주의적 국가 우선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개인의 자유권과 사회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모든 나라는 개인의 기본적 권리, 즉 자유권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 간에는 평등의 원칙이 존재함을 헌법 서두에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스웨덴·독일 등은 1조에서 3조 사이에 이를 명시한다. 반면 우리 헌법은 10조와 11조에서 비로소 국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국가가 이를 보장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그리고 법 앞에서의 평등과 다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예시를 미약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37조 2항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이 제약받는 것은 심각한 흠결이라 할 수 있다. 또 헌법 11조가 천명한 평등주의 원칙은 34조의 국가 보호주의 규정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다. 국민이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의 보호 대상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의무 이행자인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주체가 됐다. 이는 국민 참여의 권리, 국민 주체적 권한 행사를 제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다.

시론 삽화

시론 삽화

사회권 자체를 국가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인 양 접근한 것도 문제지만 여성·청소년·노인·장애인 등이 권리 주체가 아닌 객체로 대상화됐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사회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모호하게 규정한 것도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다. 모호한 사회권 규정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양극화·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실제 이혼 여성이 버스기사 취업을 희망했다가 ‘미혼·이혼·사별한 여성은 배제한다’는 버스 회사의 채용 규정에 걸려 거부당한 사례가 있다(국가인권위원회, 2016 인권상담사례집).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한다는 것이 세계적 뉴스가 됐는데 한국에서 이혼·사별한 여성에게는 버스 운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례 역시 세계적 뉴스감이다.

현행 헌법이 시대적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헌법 언어가 구태의연한 만큼 개헌은 시대적 소명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 소비자의 권리와 생명을 지킬 안전권의 부재는 정치 사찰, 세월호 참사, 가습기 피해 사례에서 보듯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또 인간 혹은 사람으로 표현돼야 할 기본권 조항에서 국민이라는 용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 역시 낡은 국가 우선주의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헌법이 국민의 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추석 명절을 보내며 국민 대이동이 이뤄지는 가운데 내년 지방선거가 벌써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약속대로 지방선거와 함께 추진되는 10차 개헌은 내용과 절차에 있어 국민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국민이 주체가 되는 분명한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헌법의 기본권은 수많은 하위 법령을 구속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권 중 평등권과 사회권을 대폭 강화한 민주적·현대적 헌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