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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에서 딜런까지…노벨상 수상자들의 숨겨진 연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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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2일 노벨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상·화학상·문학상이 잇달아 발표됐고, 6일 평화상과 9일 경제학상만을 남겨놓고 있다.

다이나마이트 발명자인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지에 따라 1901년 시작된 노벨상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다.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 및 단체에 주어지는데, 수상자는 메달과 상장, 그리고 100만달러(약 11억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 시상식은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그런데 화학상·물리학상이 있는데 왜 노벨수학상은 없는걸까. 노벨이 수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함께 노벨의 연적이 수학자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노벨은 23살 연하인 소피 헤스를 사랑하게 됐는데, 소피가 유명한 수학자와 함께 노벨을 속여 노벨을 분노케 했다는 내용이다.

두번의 결혼, 스캔들의 주인공 아인슈타인 #“불륜과 연구는 별개” 노벨상 2관왕 퀴리 #모든 사랑을 노래로 만든 사랑꾼 밥 딜러 #세번의 결혼, 유산싸움 남기고 떠난 만델라

이 대목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은 어떤 연애를 했을지 궁금해진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한 학자들도 많았지만 몇몇 유명 수상자들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1955. 1921년 노벨물리학상)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중앙포토]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중앙포토]

현대물리학의 아버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으로 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헝클어진 백발의 사자머리, 혀를 낼름 내민 파격적인 사진으로도 유명한 그의 이성관계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화려했다.
아인슈타인은 두 차례의 결혼과 수많은 여성들과의 불륜 경험이 있다. 그의 첫 결혼은 1903년 같은 대학 연구원이던 밀레바 마리치라는 신부를 맞으면서 시작됐다. 아직 젊은 연구원 신분이었다.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연구 성과를 내고 명성을 쌓아갈수록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과 첫번째 아내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의 외도로 결혼 16년만에 이혼했다. [중앙포토]

아인슈타인과 첫번째 아내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의 외도로 결혼 16년만에 이혼했다. [중앙포토]

아인슈타인은 훗날 두번째 아내가 된 엘자 레벤탈과 7년간 불륜관계로 지냈다. 첫 부인 밀레바는 남편의 외도를 참다못해 1919년 이혼했고, 이혼조건으로 “노벨상을 받을 경우 전처에게 상금을 위자료로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반드시 노벨상을 받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이혼한지 2년이 되는 해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상금은 약속대로 밀레바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두번째 부인 엘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인슈타인. [중앙포토]

두번째 부인 엘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인슈타인. [중앙포토]

아인슈타인은 전처와의 이혼절차가 끝나자 넉달만에 엘자를 두번째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재혼 후에도 아인슈타인은 다른 여성들과 몰래 연애를 했고, 엘자에 들킨 것만 6차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엘자는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고, ‘세계적인 위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지켜냈다.

마리 퀴리 (1867~1934, 1903년 노벨물리학상, 1911년 노벨화학상)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 [중앙포토]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 [중앙포토]

여성 과학자로 생애 두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 어릴 적 위인전의 ‘퀴리부인’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방사선 연구로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1911년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3년 물리학상은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수상했다.
폴란드 출신인 마리는 과학자 아버지와 교육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명석한 두뇌로 과학자로의 진로를 희망했으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시절이어서 충분한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27살이 된 마리는 자유를 찾아 프랑스로 이주했다. 연구시설을 찾고 있던 중 운명적으로 만난 이가 남편 피에르였다. 피에르는 독신으로 평생 연구에 몰두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자신의 연구인생을 이해해주는 마리를 만나 사랑하게 됐다.

마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함께 연구하는 모습. 두 사람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함께 받았다.

마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함께 연구하는 모습. 두 사람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함께 받았다.

두 딸을 낳아 기르던 퀴리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어 숨진 것. 싱글맘으로 아이들을 기르며 연구와 강의에 몰두하던 마리는 어느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가정이 있는 과학자 랑주뱅(남편 피에르의 후배)과의 사랑이었다.

랑주뱅은 당시 아내와 별거상태였는데, 그의 아내는 마리 퀴리와 남편이 주고받은 편지를 언론에 폭로하면서 두 사람의 불륜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마리 퀴리의 불륜사실을 폭로한 프랑스 신문. 마리 퀴리는 노벨상 수상은 물론이요, 학계에서도 쫓겨날 위기를 맞았으나 특유의 자신감으로 사회 편견과 맞섰다. [중앙포토]

당시 마리 퀴리의 불륜사실을 폭로한 프랑스 신문. 마리 퀴리는 노벨상 수상은 물론이요, 학계에서도 쫓겨날 위기를 맞았으나 특유의 자신감으로 사회 편견과 맞섰다. [중앙포토]

당시 유명인사였던 마리 퀴리의 스캔들 기사가 연일 언론에 보도돼 마리는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나의 개인사와 학문적 연구성과는 별개 문제”라며 두번째 노벨상을 받아냈다. 시상식은 물론, 수상자 만찬과 무도회까지 당당히 참석해 여장부다운 면모를 보였다.

밥 딜런 (1941~ , 2016년 노벨문학상)

지난해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수 밥 딜런이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딜런이 문학상을 받은 이유는 곡의 ‘노랫말’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시가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가사는 딜런의 연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보인다.

밥 딜런과 연인 수지 로틀로가 앨범 재킷 사진을 장식했다. [중앙포토]

밥 딜런과 연인 수지 로틀로가 앨범 재킷 사진을 장식했다. [중앙포토]

올해 76세가 되는 딜런은 결혼은 두차례였지만 많은 연애를 했고,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노래를 만드는 로맨틱 가이로 통했다. 앨범 ‘The Freewheelin’ ’에 수록된 명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은 당시 열애중이던 수지 로톨로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수지 로틀로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사진이 앨범 재킷 사진으로 쓰였을 정도다.

수지 로틀로와는 사귀다 헤어지기를 반복했고, 헤어져서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든 곡이 세번째 앨범에 수록된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라고 한다.

반전평화운동가인 존 바에즈와 음유시인 밥 딜런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중앙포토]

반전평화운동가인 존 바에즈와 음유시인 밥 딜런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중앙포토]

수지와 연애중 양다리를 걸쳤던 밥 딜런. 그 상대는 유명 가수였던 존 바에즈다. 반전운동가로 당시 사회저항적인 음악을 불렀던 바에즈는 연인 딜런의 음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모델 에디는 앤디 워홀의 뮤즈였다(왼쪽사진). 오른쪽은 앤디 워홀이 에디를 모델로 그린 작품. [중앙포토]

모델 에디는 앤디 워홀의 뮤즈였다(왼쪽사진). 오른쪽은 앤디 워홀이 에디를 모델로 그린 작품. [중앙포토]

이후 60년대를 대표하는 잇걸이던 모델 에디 세즈윅과 연인으로 지냈다. 에디는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뮤즈로 유명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에디는 결국 워홀을 선택했다. 에디에 버림받고 힘들었던 밥 딜런의 마음을 담은 곡이 'Just Like a Woman’이다.

65년 밥 딜런은 첫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상대는 사라 라운즈 클레어. 결혼 중 밥 딜런은 아내의 이름을 딴 ‘사라’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은 4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결혼 12년만에 이혼했다. 이유는 밥 딜런의 외도 때문이었다. 불륜상대는 캐롤라인 데니스라는 백코러스걸이었다. 이들은 딜런의 이혼 9년만에 부부가 됐다. 캐롤라인과의 사이에서도 2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넬슨 만델라 (1918~2013, 1993년 노벨평화상)  

넬슨 만델라(왼쪽)의 첫 결혼식. 에블린 메이스와의 첫결혼은 당국의 지명수배를 피해다니느라 순탄치 못했다. [중앙일보]

넬슨 만델라(왼쪽)의 첫 결혼식. 에블린 메이스와의 첫결혼은 당국의 지명수배를 피해다니느라 순탄치 못했다. [중앙일보]

남아공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철폐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백인정부에 맞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벌이던 만델라는 27년에 걸친 수감생활 끝에 정책을 바꾸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교도소에서 석방 당시 70세였던 그의 인생에 이성관계가 있었을까 의심하는 이도 있지만, 그는 세차례나 결혼했다. 그와 생을 함께 한 에블린 메이스와 위니 만델라, 그라사 마셸 세 여성은 모두 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 혹은 정치인이었다.

두번째 부인 위니와 넬슨 만델라. 위니는 투옥된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흑인정당인 ANC 최고위 여성정치인 됐지만 정치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96년 이혼했다.

두번째 부인 위니와 넬슨 만델라. 위니는 투옥된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흑인정당인 ANC 최고위 여성정치인 됐지만 정치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96년 이혼했다.

첫 결혼 당시 만델라는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으로 수배중인 상황이었고, 두번째 결혼은 옥중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제대로 가정생활을 한 건 말년의 세번째 결혼이 유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델라와 세번째 부인 그라사 마셸.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그라사는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인 사모라 마셸과 결혼했다. 비행기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라사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다 만델라를 만나 98년 재혼했다. 아프리카에서 두 나라 대통령과 결혼한 유일한 여성이다.

만델라와 세번째 부인 그라사 마셸.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그라사는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인 사모라 마셸과 결혼했다. 비행기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라사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다 만델라를 만나 98년 재혼했다. 아프리카에서 두 나라 대통령과 결혼한 유일한 여성이다.

문제는 2013년 만델라 타계 후 재산분할로 유족들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만델라가 남긴 유언장에는 두번째 부인 위니 만델라에게 단 한푼도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 당시 재산을 분할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미 2004년 숨진 첫 부인 에블린의 자녀 4명과 위니가 낳은 자녀 2명, 손자들까지 가세해 유산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자손들이라고 모두가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로버트 루카스 (1937~, 1995년 노벨경제학상)

199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루카스 교수가 부인과 상금을 반분하게 됐다는 내용의 신문보도.

199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루카스 교수가 부인과 상금을 반분하게 됐다는 내용의 신문보도.

미국의 경제학자로, 합리적 기대의 개념을 거시경제학에 적용시킨 새고전파 거시경제학(New classical macroeconomics)의 길을 연 인물이다.
그에게 복잡한 여성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혼한 전처와 노벨상금(1백만 달러)을 절반으로 나눠가졌다. 노벨상을 받기 7년 전 이혼한 루카스와 부인 리타 C 루카스. 남편이 훗날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있음을 예견한 리타는 변호사에게 이혼계약서에 "그가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의 절반을 자신에게 지급토록 한다"는 명문조항을 삽입토록 했다. 노벨상에 '배우자의 가능성을 꿰뚫어보는 분야'가 있다면 리타 여사가 유력한 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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