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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긋한 볼살의 대세, 로코코형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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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결정할 때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내 얼굴도 이제 시술의 문턱을 바라본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입안에 바람을 채우는 버릇, 볼을 애써 봉긋하게 하는 이 동작이 언제부터 몸에 배었는지 모른다. 속상하다. 화장만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는 한계점에 이르렀나 보다. TV나 잡지에 등장하는 연예인과 웬만한 명사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탄력 있는 뺨을 뽐낸다. 대세는 봉긋한 복숭아 볼이다. 부럽다.

초등학교 때 TV 속 아이스크림을 광고하던 배우 정윤희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몽글한 콧방울과 봉긋한 볼살이 자아내는 해맑은 미소에 흠뻑 반했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메릴린 먼로의 얼굴은 장미꽃 같다. 이들의 얼굴은 발랄하고 생명력으로 차 있다. 성숙한 여성성과 함께 젊은 동안(童顔)으로 무장한 채 마치 무르익은 과일이 곧 수확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유럽 여행지 어디에서든 쉽게 구하는 메달에 그려진 귀부인의 뺨이 도톰하다. 그 부인은 화려한 레이스와 리본을 단 옷을 입고 꽃장식에 파묻혀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어령이 어릴 때 접한 서양 문화에 관한 첫 경험은 누님 방의 유리상자 속 프랑스 인형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한국 여인만 보다가 새파란 눈의 서양 귀부인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비교되고 동경하게 되고 어쩌면 자존감의 손상을 맛봤을지도 모른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캔버스에 유화.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캔버스에 유화.

18세기 프랑스에서 귀족들 사이에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절대왕정 시기의 과잉된 장식으로 잔뜩 멋을 부렸다. 귀부인들 사이에는 복숭아 빛의 탐스러운 볼을 한 얼굴이 트렌드였다. 이들의 취향이 반영된 미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한다. 그 중심에 루이 15세의 후궁인 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가 있다. 전해지는 로코코 초상화의 상당수는 퐁파두르의 얼굴을 그린 것들이다.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이라 불렸다. 베르사유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실세이자 당대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퐁파두르는 다른 로코코 여인들처럼 정물화 속의 꽃이었을까? 그녀는 외모나 교태로 승부하지 않았다. 수많은 그림 속에 항상 책을 들고 있다. 그녀가 마흔까지 루이 15세를 사로잡은 것은 지성과 교양이었다. 퐁파두르는 왕의 총애에 자신을 묶어 두지 않고 재능을 발휘해 해군의 제복을 개량하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브르 자기를 개발하는 등 왕의 주변을 바꿨다.

요즘 사방에 성형외과 광고의 ‘비포 & 애프터’ 사진이 차고 넘친다. 성공한 사례들은 한결같이 로코코형 미인들로 변신해 있다. 보톡스를 맞고 필러를 채워 얼굴 곳곳이 봉긋해 있다. 예전에는 성형이 큰 수술이었다면 지금은 10분 만에 필러 주사만 맞는 시술이니 도처에 로코코형 미인들로 넘쳐난다. 일부 성형외과는 ‘로코코 미인을 만들어 드린다’는 광고를 한다.

서양에선 ‘매력적’이라는 표현에 열광한다. 한편 한국에선 ‘예쁘다’가 최고의 찬사가 됐다. 그리고 예쁜 여자들은 모두 비슷하다. 달걀형 얼굴에 발그레한 볼. 나도 물론 그런 로코코식 성형의 유혹을 외면하기 힘들다. 하지만 최근 옛날 스케치북들을 넘겨보다 생각을 바꿨다. 화가들은 모델을 택할 때 성형 미인은 선택하지 않게 된다. 표정과 골격의 미묘한 흐름이 중요한데 성형을 한 얼굴에선 그런 감정과 분위기 전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정형화되는 것은 나를 잃는 것’으로 경계한다. 정형화된 얼굴에는 개성이 없다. 긴 코와 큰 눈의 비잔틴형, 신비로운 성녀(聖女) 같은 르네상스형처럼 시대에 따라 미적 기준이 달랐다. 나도 언젠가 시술의 신세를 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가을은 버텨 볼 작정이다. 대신 퐁파두르처럼 책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녀도 결국 미모보다 ‘벨 사방(학식 있는 여인)’으로 더 인정받지 않았던가. 이번 연휴엔 거실 탁자 위 거울을 치우고 읽고 싶던 책 몇 권을 올려놓아야겠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