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건축 그늘막, 재현 그리고 재해석

중앙선데이

입력 2017.10.0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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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호 16면

[FOCUS] 아름지기 기획전 ‘해를 가리다’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3층에 설치된 차일.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3층에 설치된 차일.

화성원행의궤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원행의궤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초의 건축은 무엇일까. 자연 동굴을 제외하고, 인류가 직접 만든 건축물은 ‘막(幕) ’일터다. 한자에 뜻이 충실하게 담겨 있다. ‘풀 따위의 지붕(艸)을 덮어 해(日)를 가리는 큰(大) 천(巾)’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총장은 “원거리 농업을 해야 하는 농민들은 일시적인 농막을 지었고, 여기서 물건을 떼어 저기서 팔아야 하는 상인들은 휴대용 그늘막을, 야전에서 싸움을 해야 하는 군인들은 군막을 자신들의 셸터(Shelter)로 삼았다”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다. 제사·장례·결혼 등 각종 의례 때면 마당에 막을 치고 그늘부터 만드는 게 일이었다. 최초의 건축이자, 최소의 건축이기도 한 천막은 건축물이 한자리에 뿌리내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쓰이고 있다.

전통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조명해온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는 올해의 기획전 ‘해를 가리다’(11월 10일까지)를 통해 이 원시적인 공간을 탐구했다.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집공방이 사료를 바탕으로 재현한 선조들의 그늘막과 국내 건축가들이 이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곳곳에 설치됐다. 볕 좋은 가을날, 쉬었다 가기 좋은 전시다.

3층 차일

3층 차일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면 원류부터 잘 연구해야 하는 법이다. 온지음은 1여 년의 연구 기간 동안 사료 속 그늘막의 모습부터 샅샅이 훑었다. 관련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옛 그림이나 사진 속 그늘막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가장 단출한 그늘막의 형태는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 중 ‘논에서 김매는 농부들’ 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여행하다 만난 지방의 풍속을 예리하게 포착한 그림답게 생생하다. 구석구석 찬찬히 볼수록 재밌다.

그림은 제목대로 논에서 농부들이 열심히 김매는 모습을 담아냈다. 아낙네도 일꾼들 먹일 새참 광주리를 이고서 걸음하고 있다. 여름 땡볕 속 모두가 일하는데 딱 한 사람이 쉬고 있다. 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머리 위 펼쳐진 ‘해가리개’다. Y자 받침목을 땅에 묻고 거기에 또다른 막대기를 비스듬히 걸치고선 무명천 지붕을 지탱하게 했다. 이 소박한 해가리개는 아름지기 사옥 2층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 최소의 공간이지만 충분히 아늑해서 놀랍다. 멍석을 깔고 앉은 자리에서 경복궁의 울창한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림에서 해가리개 아래 앉은 남자는 일 하는 농부를 보고 있다. 뙤약볕 아래 일하는 농부는 차지할 수 없는 그늘이다. 그늘을 차지한 남자는 아마도 고용주일 터다. 그래서 그늘은 “자연에 도전한 인간이 뭔가 이루었다는 상징적인 장소(김 총장)”이자, 권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궁중 의례를 그린 그림에는 임금님용 그늘막이 등장한다.

안은 비단, 밖은 무명천으로 만든 왕의 ‘외빈내화’ 그늘막

어막차(왼쪽)와 이를 현대화한 막차형 텐트

어막차(왼쪽)와 이를 현대화한 막차형 텐트

해가리개

해가리개

1층 전시장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어막차(御幕次)다. 조선시대 왕과 세자, 고관대작이 궁중 행사 때 잠시 머물 수 있게 제작한 임시 시설물이다. 이번 전시의 모티브가 된 어막차는 ‘봉수당진찬도’를 참조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행차 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해 베푼 진찬이었다.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한 단폭의 ‘봉수당진찬도’에는 어막차의 실내 장식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화성원행의궤도’의 봉수당진찬도에는 ‘어막차’라는 한글까지 또렷이 적혀있다.

온지음이 그림을 바탕으로 재현한 어막차는 겉은 소박하되 안은 화려하다. 조선시대 군주들의 정신인 ‘외빈내화(外貧內華)’를 가설형 시설에도 담아냈다. 막의 겉감은 검정밤색으로 염색한 무명천을 사용했고, 안감은 쪽빛의 비단으로 화려하다. 막을 내리면 독립적인 공간이 되고, 막을 걷어올리면 사방으로 탁 트인 정자가 된다. 걷어올린 모습은 팔작 지붕이 하늘로 뻗친 모양처럼 경쾌하다. 바로 옆에는 옛 모양은 살리되, 조립과 운반이 쉽게 현대화한 막차형 텐트도 전시됐다. 아름지기 신혜선 선임연구원은 “어막차의 목 구조를 알루미늄 폴 구조로 변경해 10분 내에 설치 및 해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옥 서까래 끝 구름처럼 달린 차일이 만든 넓고 깊은 공간감

건축사사무소 stpmj의 ‘차일 르네상스’

건축사사무소 stpmj의 ‘차일 르네상스’

건축가 그룹 SoA의 ‘가지붕’

건축가 그룹 SoA의 ‘가지붕’

국내 건축가 그룹은 인류 최초의 건축이기도 한 그늘막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건축가 이승택ㆍ임미정이 이끄는 건축사사무소 stpmj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해가림용으로 만들었던 ‘차일’을 재해석했다. 어떤 한옥이든 나사나 접착제 없이 서까래에 끼워 설치할 수 있다. 하얀 노방으로 만든 차일이 아름지기 한옥 처마 끝에 구름처럼 매달려 있다. 하늘이 비칠 정도로 얇지만 방수 처리한 덕에 가랑비 정도는 막을 수 있다. 툇마루에 앉아 서까래 끝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기 좋다. 한옥 지붕 아래 공간이 더 확장된 기분이 든다.

강예린ㆍ이재원ㆍ이치훈으로 이뤄진 건축사사무소 SoA와 서울대 최춘웅 교수(건축학과)의 그늘막은 설치작품에 가깝다. 최 교수는 가려진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집중해 우산 형태의 가림막을 만들었고, SoA는 관람객이 지붕에 연결된 손잡이를 당겨 움직일 수 있는 ‘가지붕’을 만들었다. 이치훈 소장은 “사람이 그늘을 조작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지붕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아름지기는 2004년부터 매년 번갈아 가며 의ㆍ식ㆍ주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주’ 생활문화에 관한 전시다. 한옥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한옥 공간의 새로운 이야기’(2008), 전통 가구를 재해석한 현대 가구전 ‘절제미의 전통에서 실용을 찾다’(2011), 건축 공간 중 문을 주제로 한 ‘소통하는 경계, 문’(2014)에 이어 네 번째다. 전통의 정신과 미감을 오늘날 일상에 걸맞게 다듬고 발전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이번 기획전의 경우 사람이 만든 최초의, 최소의 공간인 ‘막’에 집중했다.

공간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체험이다. 전시된 모든 작품들이 오래 머물며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특히 3층 야외공간에 가면 대나무 다발 기둥에 매달린, 독립형 차일이 널찍한 그늘길을 만들고 있다. 하얀색 삼베 차일장 아래 옻칠한 무명천을 한번 더 펼친 덕에 해와 비를 피하기 좋다. 민영환의 국장례식 행렬 사진(1904) 속 차일을 온지음이 재현한 것이다. 그 아래 앉아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시공간을 훌쩍 초월한 느낌이 든다.

신연균 이사장은 “전시 기간 동안 아름지기 사옥은 단순히 전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열린 공간, 현대 도시 속에서 과거의 영감을 재발견하는 공간, 우리에게 맞는 놀이와 소통,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관람객에게 프릳츠 커피 또는 온지음 맛공방의 영귤차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한다. 한복을 입었거나 정오~오후 2시 사이에 입장하는 이들은 무료다. 관람료 5000원. 추석 연휴 기간인 10월 2일~6일 및 월요일 휴관.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아름지기ㆍⓒ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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