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람을 카테고리화(범주화)해 재단하는 것은 인격 훼손"

중앙일보

입력

작가의 요즘 이 책 - 은희경

 우리가 사랑하는 이 시대의 작가들은 요즘 어떤 책에 꽂혀 있을까. 그들 글쓰기의 뿌리에서 자양분 역할을 하는, 작가가 읽는 책 얘기를 작가로부터 직접 듣는다. 그들의 작업실을 찾아가서다. 표정과 육성이 살아 있는 책 소개, '작가의 요즘 이 책'이다. 10~15분 길이 동영상과, 동영상에 못 담은 얘기는 기사로 함께 전한다. 여섯 번째 순서는 신데렐라처럼 우리 곁에 찾아와 20년 넘게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군림해온 소설가 은희경(58)이다. 그는 화사한 이미지가 강한 자신의 소설과 빛깔이 다른,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의 질박한 소설 『스토너』를 소개할 책으로 선택했다. 그의 소설 원리처럼, 취향에도 역설이 작용한 걸까. '작가의 요 즘 이 책'은 3주 간격으로 토요일 새벽 업데이트된다. 지금까지 김훈·정유정·김연수·권여선·조남주를 만났다.

『새의 선물』 70만 부 팔린 작가 경력 23년째 은희경 #"소설 쓰기 고통스럽지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 #

  언젠가 기사에서 써먹은 적 있는 표현이지만, 은희경의 1995년 장편 『새의 선물』은 한때 통과의례처럼 챙겨 읽는 소설이었다. 80년대 그런 소설이 조정래의 『태백산맥』, 70년대에는 황석영·조세희·최인호 등의 작품들이었다면 90년대에는 『새의 선물』이 리스트의 한 항목이었다. 기자도 마찬가지. 집에 있는 소장본은 98년 5월에 제작된 1판 33쇄다. 지금은 판매 부수가 좀 더 늘었겠지만(시대의 대표 베스트셀러는 세대를 거듭해 읽힌다), 2014년 현재 『새의 선물』은 70만 부가 팔렸었다. 그런 규모로 팔리다 보니 기자가 70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거다.

 70만에 속하거나, 속하지는 않지만 풍문으로라도 전해들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소설 속 구절은 낯설지 않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소설의 위악적인 열두 살 주인공 진희, 이제는 30대 중반의 대학교수가 돼 자유분방한 삶을 이어가는 진희가 과거를 회고하며 내뱉는 독백은 우리들 마음 안의 보편적인 데를 건드렸다. 나는 아직도 마음 속 씨방에서는 어린 아이라는 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르는 게 없는데 사람들이 그런 걸 몰라준다는 의식 말이다.
 사실 진희의 독백의 포인트는 그가 지워버린 것들의 목록이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이런 것들이었다. 이것들이 부정된 세상은 동정심이 없는 세상, 선와 악의 경계가 흐려지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없으며 유일무이한 것,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삭막한 세상일 게다. 덕분에 은씨는 삶의 진실에 던져지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의 작가(문학평론가 김화영), 우리들 허위의식의 급소를 치명적이지 않게, 핏방울이 살짝 돋을 만큼만 찌르는 발빠른 여검객(문학평론가 이성욱)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의 작품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는 얘기였다.

 『새의 선물』을 내던 95년 초 동아일보로 등단했으니 작가 이력 23년째. 은씨의 출간 목록은 산문집을 빼고, 소설책만 13권으로 두터워져 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어떤 경우 악착같았을 것이다. 꾸준하고 그래서 다음이 기다려지는 출간 보폭이다.
 어떤 분야에서나 나름 달인이 될 만한 시공간이지만 은씨는 아직도 소설 잘 쓰는 법을 모르겠다며 엄살을 떠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이는 특유의 염세적인 혹은 비관적인 세계관과 관련 있다. 비관주의를 삶의 전략으로 삼아, 모든 일에서 나쁜 결과를 미리 예상해두면 최소한 예상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테니 고통스러운 삶을 그만큼 쉽게 견딜 수 있으리라는 접근법 말이다. 그런 태도를 '비관주의로 인생 살기'쯤이라고 해두자.

2014년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은희경씨. 당시 황순원문학상수상자로 선정됐다. AP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일한 시리아 출신 소설가 키나나 이사가 찍어준 사진이다.

2014년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은희경씨. 당시 황순원문학상수상자로 선정됐다. AP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일한 시리아 출신 소설가 키나나 이사가 찍어준 사진이다.

 은씨 본인은 괴롭겠지만 고통스럽게 쥐어짠 그의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는 즐겁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삶에 슬쩍 끼어 있는 거품 몇 방울 걷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은씨는 만날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소설은 왜 쓰는 걸까.
 "음, 뭐 직업이니까요. 그렇다고 그게 뭐 힘들기만 하겠어요? 운동은 하면 힘든데 왜 하겠어요? 가만히 누워 있으면 제일 편한데. 힘들게 언덕을 자전거로 오르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겠냐구요. 힘들지 않고 누워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죽밖에 더 있겠어요? 앉아 있어야 먹는 것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지, 내가 말한 글쓰기의 고통은 작업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기 때문에, 이 힘든 걸 왜 하지, 하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렇다고 다른 일이라고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내 인생에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또 이거니까요."
 은씨의 발언을 옮기고 나니 어리석은 질문에 화가 난 속사포 대답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실제 '발화 상황'은 그렇지 않고 한 없이 부드러웠다. 속으로는, 바보 같은 질문이네, 혀를 찼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껴진다. 어쨌든 인생이 두부 모 자르듯 마냥 좋거나 마냥 싫기만 한 게 아니라 희노애락이 두루 섞여 있는 것처럼 문학 문답도, 은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내면도 획일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은씨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그런 거다.

 은씨가 말했다. "어떤 게으른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은 게으르다 보니 매사에 의욕도 없을 거다, 라는 식으로 말하기 쉬운데 어떤 사람을 그런 식으로 카테고리화 해버리는 자체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인격적인 훼손을 가할 뿐 아니라 결국 그 사람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굉장히 복잡한 존재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렇게 함부로 속단하거나 대해서는 안 되는, 어떤 존엄성을 갖춘 존재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하고 싶거든요." 자기 소설이 그런 인간학의 임상 사례라는 얘기. 스스로 마이너리그에 속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얘기였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