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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언제든 칼날 쥘 날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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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정치부 부데스크

고정애 정치부 부데스크

“정부 바뀐 줄도 모르고 그따위 보고를.”

현 정부부처 보고 때 나온 고함이다. 공약 이행을 위해 이런저런 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극히 공무원스러운 말을 하던 공무원을 자문 교수가 타박했다고 한다.

이를 전하던 공직자의 눈이 이글거렸다. 정치 성향을 좀처럼 알기 어려운 이였는데 이렇게 말했다. “역대 정권에서도 과거를 뒤져 솎아 낼 사람들을 솎아 냈다. 대신 암암리에 했다. 이번엔 공개적으로 당당한 양 한다. 완장 찼다.” 실제 국가정보원·국방부·외교부는 물론 교육부도 난리다. 시켜서 한 일인데 부역자 취급한다고 들었다. 적폐 청산이 명분인데 그 시효를 딱 9년으로 한정했다. 이전엔 폐해가 없었던 듯 말이다. 고소·고발도 이어지며 검찰청 앞도 카메라 플래시로 환하다.

현 정권의 기억이 그러할 터다. 정의의 편이란 확신까지 있으니 추호의 의심도 없을 게다.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과거 찾아와 웃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너무 매몰찼다. 여권에 비협조적이란 이유로 적대시하고 토멸 대상으로 삼는 데는 과거 정권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현 정부가 ‘성군(聖君)’ 시대로 믿는 DJ를 향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분개다. 안기부에서 도청했고 야당 의원들을 빼갔더랬다. DJ는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했지만 이 전 총재는 “정치 보복”이라고 봤다. 야당 지지 연예인들은 TV에서 사라졌고, 여당 지지 단체들은 풍족했다. 블랙리스트도 화이트 리스트도 있었다.

현 정부가 전전(前前) 대통령까지 ‘소환’하자 야권이 전전전, 전전전전 대통령들을 불러들이며 반발하는 이유다. 가끔 욱할 뿐 순한 사람이란 평판의 야권 인사가 투사가 됐다. 6·25 이후 최대의 안보 위기라는데 북한보다 야권에 더 찬바람이 분다고들 말한다.

사정(司正)의 칼날은 예리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이다. 또 그래야 가슴에 부당한 또는 불필요한 멍이 드는 이가 줄어든다. 그게 권력자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진보→진보(보수→보수)로의 정권 재창출도 본질적으론 정권 교체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칼자루 아닌 칼날을 쥘 날이 온다. 다시 ‘완장 교수’의 얘기다. 그는 직후 조용히 공무원을 찾아 진심을 담아 말했다고 한다. “미안합니다.” 정권의 유한함을 안 게다.

고정애 정치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