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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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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물관 한쪽에 쇠로 만든 나무가 늘어서 있다. 마치 시베리아 침엽수림을 보는 듯하다. 최기석 작가의 ‘철의 숲’이다. 철 구조물 25개를 빽빽하게 배열했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인의 일상을 ‘철의 문화’로 표현했다. 어쩐지 날카롭다. 써늘하다. 자연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은유한다. 그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한 ‘쇠·철·강-철의 문화사’에 나온 설치작품이다.

현대문명을 풍자한 최기석 작가의 설치미술 '철의 숲'. 박정호 기자

현대문명을 풍자한 최기석 작가의 설치미술 '철의 숲'. 박정호 기자

철의 원소기호는 Fe. 인류와 가장 친숙한 금속이다. 김서형 인하대 연구교수는 『Fe 연대기』에서 빅뱅부터 우주정거장까지 철을 둘러싼 우주의 역사 138억 년을 돌아봤다. ‘철의 문화사’ 특별전 취지도 다르지 않다. 먼 옛날 우주에서 날아온 운철(隕鐵)부터 현대작가들 미술품까지 총 730여 점이 나왔다. 한마디로 철이 없는 인간은 있을 수 없었다.

전시는 철의 양면성을 주목한다. 무엇보다 철의 역사는 무기의 역사였다. 화살촉·도끼부터 칼·총·대포까지 침략과 정복이 이 땅을 휩쓸었다. 특히 고대국가에서 철은 곧 권력이었다. 철을 주무르는 자가 세상을 움직였다. 철의 문화를 일군 히타이트가 대표적이다. 기원전 1500년 무렵 오리엔트 문명을 지배했다. 반대로 철은 이기(利器)의 대명사다. 석기·청동기에 이어 철기혁명을 이뤘다. 사람들 주린 배를 채웠다. 생산성 향상의 원동력이었다. 포항제철 신화를 이룬 20세기 한국인에겐 더욱 그렇다.

고대 철기문명을 일군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 풍경. 최대 1만20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철기문명을 일군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 풍경. 최대 1만20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달 전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튜샤를 방문한 적이 있다.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150㎞, 고도 1000m, 면적 200만㎡의 고도(古都)는 웅장했다. 하지만 그때 마음에 남은 건 철이 아니었다. 제국을 이룬 히타이트의 소프트웨어였다. “타 지역 문화를 흡수하는 관용과 동화 정책이 히타이트의 성공 비결”이라는 강인욱 경희대 교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실 막바지, 첫눈에도 믿음직한 통일신라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이 관객을 배웅한다. 감은 듯, 뜬 듯 지긋한 눈매가 매혹적이다. 세상의 온갖 모순을 녹이는 부처의 미소다. ‘철의 후예’를 넘어 ‘핵의 포로’가 된 오늘 우리들의 안부를 묻는 듯했다. 사실 철보다 무서운 게 핵의 두 얼굴이다. 강하지만 쉽게 삭아버리는 철을 조화롭게 다뤄온 역사의 지혜가 더욱 절실한 때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