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만 되면 빚 독촉 전화” 4년 새 310만 명 빚 연체 경험

중앙일보

입력 2017.09.28 01:33

업데이트 2017.09.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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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환위기 20년 <상> 새로운 위기 대비하라 

“아침 9시만 되면 싫었어요. 휴대전화로 카드사에서 연체 독촉 전화가 오기 시작해 오후 6시까지 이어져요. 하루에 스무 통 넘게 왔어요. 금요일 오후 6시가 되면 기뻤어요. 왜냐면 주말엔 전화가 안 오거든요.”

기업대출에 덴 은행, 가계대출 확대
가계빚이 소비 악화, 경기 침체 불러
취약 대출자 금리 인상 땐 큰 충격
“채무조정과 복지 지원 병행돼야”

시간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김정희(29·여·가명)씨는 카드 연체에 빠졌던 지난해를 회상하며 진저리를 쳤다. 사립유치원 교사였던 김씨는 결혼할 때만 해도 매달 120만원씩 저축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 직후 남편 사업비와 전세금 대출로 인해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이가 생기자 일을 그만뒀다가 시간제로 재취업했다. 지금은 카드 연체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전세자금 대출 이자를 갚으면서 생활하는 게 큰 부담이다.

신용정보원에 따르면 약 310만 명이 최근 45개월(2013년 1월~2016년 9월) 안에 한 번이라도 빚을 제때 갚지 못해 채무불이행자(3개월 또는 50만원 이상 연체)로 등록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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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엔 가계부채가 이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9월 말 가계부채(가계신용)는 사상 처음 200조원을 넘어섰지만 당시 은행권 총대출에서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대 중후반이었다. 그땐 가계부채가 아닌 부실화된 기업부채가 위기 요인이었다.

하지만 올해 6월 말 가계부채 총액은 1388조원으로 불어났다. 8~9월엔 1400조원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년 동안 7배로 불어났다. 가계부채 급증에 대해선 다양한 원인 분석이 나와 있다. 외환위기 때 기업대출에서 손실을 본 금융회사가 기업 대신 가계대출 영업을 강화했고, 이는 저금리와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와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신용카드 규제를 풀면서 쉽고 빠른 대출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가계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불어나 그 자체로 경제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계부채 증가→유동성 제약 완화→소비 증가→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가 깨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대로 가계부채 증가→소비 악화→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국회 현안보고에서 “한국의 가계부채는 증가속도나 총량 수준이 높아 소비와 성장을 제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국제결제은행(BIS) 보고서에 따르면 1분기 한국 가계의 총체적상환능력비율(DSR)은 12.5%로 1년 전(11.8%)보다 0.7%포인트 올랐다. 조사 대상 17개국 중 상승폭이 가장 컸다. 소득보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랐다는 뜻이다.

손종칠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가계부채 규모가 임계치인 가처분소득의 1.9~2.4배를 넘어서면 그 가구는 소비에 제약을 받게 된다. 부채를 보유한 가구 중 18.6~25.3%가 이미 이에 해당한다.

가계부채라는 뇌관을 건드릴 수 있는 위험요인은 현실화되고 있다. 손종칠 교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양적 축소에 이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선다면 한국은행도 6개월쯤 뒤엔 금리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당장 외화 유출로 금융시스템이 흔들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이미 한계 상황에 놓인 저소득 취약가구가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실제 취약차주들은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지난해 법원에서 개인회생 선고를 받은 30대 가장 A씨의 사례가 이를 드러내준다. 3년 전만 해도 중견기업 팀장인 김씨는 월급이 350만원 정도로 전세자금 대출 말고는 빚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주 아파 병원에 여러차례 입원하면서 병원비가 1000만원 넘게 들면서 카드론·현금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어 부모님이 연달아 암 판정까지 받으며 상황이 악화됐다. 몇백만원에서 시작한 고금리 대출이 어느새 1억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달 내는 금융비용만 250만원에 이르자 결국 연체에 빠졌다. 전세보증금과 급여마저 압류되기 직전에 몰린 그는 개인회생절차를 신청해 채무를 절반으로 줄인 뒤 매달 90만원씩 갚아나가고 있다.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 센터장은 “IMF 이후 쉽게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의 영업행태와 맞물려 가계부채가 급증했다”며 “지금은 소득보다 부채가 더 빨리 증가하고 있는 가계부채 비상사태인 만큼 비상적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장기소액연체 채권에 대한 과감한 채무조정과 함께 취약차주를 위한 복지지원 강화가 뒷받침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계부채 문제를 금융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대명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빚이 있는 저소득층에 저금리 대출을 지원해주는 정책은 부채 규모만 키워 수습할 수 없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며 “돈을 꿔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주거·보육·교육 등 꼭 필요한 분야의 복지가 뒷받침 돼야 부채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년 부채 문제를 연구한 김세림 서울복지재단 연구원은 "일부 지자체가 청년 학자금 대출이자 지원사업을 시작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청년이 빚을 지지 않을 수 있도록 기본적인 소득보장 을 위한 사회적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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