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럽 중도좌파 줄줄이 하락세…'설익은 사회주의자'로 불리던 제러미 코빈을 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초상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초상화.

2005년 5월 8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선에서 3연임에 성공한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총리가 총리실 문 앞에서 선거 소감을 밝혔다. 승리했지만 블레어 총리는 뉘우치듯 “국민이 정부에 기대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알았으니 그에 초점을 맟추겠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여전히 매우 고통스럽다"면서 국민들 사이에 일고 있는 반 이민 정서를 언급했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35.2%를 득표했는데, 전체 유권자 기준으로 22%의 지지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 정부로서 매우 낮은 지지였음에도 선거 제도 덕분에 집권을 연장했던 노동당은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인 2010년 총선에선 29%로 득표율이 더 떨어졌다. 198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보수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독일 총선서 사민당 역대 최저 득표 #프랑스 사회당은 대선 거치며 소멸 위기 #복지 확충 주도하던 중도좌파 정당들 #세계화 파고에 양극화 겹쳐 지지층 이탈 #우파 따라하다 국수주의 정당에 밀려 #'설익은 사회주의자' 불리던 제러미 코빈 英 노동당 대표 #부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등 노선 충실한 공약 제시 #청년층 투표율 견인…"중도 사민주의는 끝났다" #가디언 "좌파정당 신자유주의 대체할 경제 모델 찾아야" #

 유럽 대륙에서 중도좌파 정치 세력의 위기가 심각하다.
 사회당ㆍ사회민주당 등의 명칭을 쓰는 중도좌파 정당들은 10여 년 전만 해도 유럽 상당수 나라에서 집권당이었다. 하지만 선거를 거듭할 수록 집권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나마 영국에서 노동당이 지난 6월 총선에서 상승세를 보인 정도다.

독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을 이끈 마르틴 슐츠. 집권 연정에 참여했던 사민당은 지지율 하락에 따라 야당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을 이끈 마르틴 슐츠. 집권 연정에 참여했던 사민당은 지지율 하락에 따라 야당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부상과 기성 중도 양대 정당의 쇠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AfD 지지자의 60%는 “다른 정당에 반대한다”고 밝혔는데, AfD와 신념이 같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34% 뿐이었다. AfD는 2013년 총선에 기권했던 120만명을 끌어들인데 더해 중도우파 기독민주ㆍ기독사회 연합에서 100만명,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에서 50만명의 지지자가 옮겨간 것으로 추정됐다.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주요 이념의 하나로 내세운 독일 사민당은 블루칼라 노동자가 주 지지층이었다. 특히 광산과 철강 산업이 주를 이루는 독일 최대 공업지대 루르지역 등에선 사민당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왔다. 하지만 사민당이 당의 정강과 달리 중도우파 연합과 연정을 꾸려 친시장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실망한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등을 돌렸다. 이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극우정당을 지지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독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사민당 지지자 중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7%에 불과한 반면 AfD의 노동자 유권자 비율은 34%에 달했다.
 중도좌파 정당의 몰락은 유럽 전역에서 진행 중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지난 5월 대선 결선에 후보가 진출하지 못했고, 이어진 6월 총선을 거치며 당세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지난 5월 대선 때 프랑스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왼쪽) 후보는 지지율이 낮아 대선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지난 5월 대선 때 프랑스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왼쪽) 후보는 지지율이 낮아 대선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의 중도좌파 정당도 불만을 품은 유권자가 늘고 극우 정당이 이민에 따른 복지 축소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면서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이틀간 실시된 노르웨이 총선에서 집권 중도우파 연합이 정권을 재창출했다. 선거 중반까지 50% 안팎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중도좌파 연합은 막판 지지자 이탈로 석패했다.
 다음달 15일 오스트리아 총선을 앞두고 중도우파 국민당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고, 집권 사회민주당은 극우 자유당과 2위 다툼을 벌이는 실정이다. 스페인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0년 동안 지지율이 반토막 났다. 그리스 사민당은 집권당에서 지지율 5% 미만으로 추락했다.
 중도좌파 정당의 침체 조짐은 1990년대부터 나타났다. 70년대까지 유럽에선 완벽한 수준을 목표로 복지 확충이 진행됐는데,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들이 해당 이슈를 주도했다. 하지만 복지체계가 갖춰진 뒤에는 좌파 정당의 필요성이 감소했다.
 1990년대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유럽 각 국에선 실업률이 증가했다. 국민소득은 늘었지만 근로자 계층의 임금은 정체되는 등 양극화가 심해졌다. 주로 근로자 계층과 중산층 이하가 세계화의 역풍을 맞았다.
 우파 정당들이 복지 확대 같은 좌파의 어젠다를 받아들이면서 정당의 이념적 구분도 모호해졌다. 그런데도 유럽 중도좌파 정당들은 중도우파와의 연정에 참여하면서 긴축 재정 정책을 막지 않았다. 복지가 축소돼 사회적 약자층에 악영향이 미쳤는데, 그에 따른 비난의 화살은 중도 좌파를 향했다.
 전통 지지기반인 노동자의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도 위기를 부추겼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가 늘어 나는 시대에 이들을 대체할 자동화도 동시에 진행됐다. 좌파 정책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선명한 좌파에만 열광한다. 프랑스 대선에서 극좌 장 뤼크 멜랑숑이 1차에서 19.6%를 득표한 게 대표적이다.

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테리사 메이 총리의 승부수였던 조기총선에서 노동당은 선전했다. 집권 보수당의 ‘하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코빈 대표는 최대한 EU에 잔류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주장해왔다. [A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테리사 메이 총리의 승부수였던 조기총선에서 노동당은 선전했다. 집권 보수당의 ‘하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코빈 대표는 최대한 EU에 잔류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주장해왔다. [AP=연합뉴스]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중도좌파 정당들에게 영국 노동당의 코빈 대표가 롤 모델로 꼽힌다.
 노동당은 지난 6월 조기총선에서 30석을 늘려, 2005년 이후 가장 많은 262석을 차지했다. 득표율 40%는 2001년 이래 노동당이 얻은 가장 높은 수치였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과반을 상실하게 만들어 ‘하드 브렉시트’에 제동을 걸었다.
 이같은 성과는 코빈이 좌파 색채가 뚜렷한 공약을 제시하며 청년층을 흡수한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68세인 코빈은 1983년 총선을 통해 하원에 입성한 이후 34년 동안 내리 9선을 했다. 집권당 의원이던 1997년 이후 500여 차례 당론을 거역한 그는 당내에서 ‘배신자'로 불렸다. 하지만 지난 2015년 노동당의 당수 선출방식이 선거인단제도에서 일인일표제로 바뀐 덕에 대표에 뽑혔다. 거리에 나가 지지자들과 만나길 즐기던 코빈을 밀어주려는 당원들이 투표장에 밀려든 결과다.
 ‘설익은 사회주의자'’가장 무책임한 당 파괴자'라는 비난을 받던 코빈은 메이 총리가 조기 총선 카드를 던지자 “중도사민주의는 끝났다. 체제를 변혁하기 보다 관리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그러고선 사회주의 노선에 충실한 공약을 내놨다.
 노동당은 선거강령에 대학등록금 폐지, 보편적 무상급식, 철도와 우편 등 재국유화, 부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담았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나 일방적 핵비무장 등 보수당 정권의 안보 공세를 부를 정책은 시도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실용적 자세도 취했다. 결과는 예상 밖의 선전이었다.

베를린시의회 '입성'에 열광하는 독일 극우당 [EPA=연합뉴스]

베를린시의회 '입성'에 열광하는 독일 극우당 [EPA=연합뉴스]

 영국 가디언은 “사민당 계열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완화하려고 했던 시도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극우 AfD의 약진은 중도좌파 정당들이 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이어 “유럽의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이 점점 가난해지고 자녀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졌으며 금융과 자산개발 분야의 엘리트들만 부자가 돼가는 것을 알고 있다"며 “중도좌파 정치세력은 신자유주의 대신 사람들의 요구를 시장의 힘보다 앞에 두는 경제 모델을 찾지 못하는 한 계속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도좌파는 보수진영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처럼 경제모델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방안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안은 셈이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