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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가 평창동계올림픽에 꽂힌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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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는 망한 게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회사가 된 겁니다. 

지난 4일 핀란드 헬싱키 에스푸의 노키아 본사. 노키아의 몰락 원인을 묻는 질문에 라우리 옥사넨 부사장은 “우리는 휴대전화 회사에서 4차 산업혁명 선도회사로 완전히 변신했다”고 답했다. 특히 이동통신망을 구축하는 네트워크 장비 분야에선 2016년 알카델-루슨트를 인수하면서 스웨덴 에릭슨, 중국 화웨이를 제치고 세계 1위가 됐다고 했다.

2013년 휴대전화 사업 접은 노키아 #5년 만에 네트워크시장 강자 만든 건 #핀란드 특유의 끈끈한 산학협력 덕분 #퇴직자 창업 도운 '브릿지 프로그램' #핀란드 스타트업 기술 수준 크게 높여

핀란드 헬싱키 에스푸의 노키아 본사 전경.                        [사진 정경민 기자]

핀란드 헬싱키 에스푸의 노키아 본사 전경. [사진 정경민 기자]

옥사넨 부사장은 “요즘 우리의 관심은 온통 강원도 평창에 쏠려 있다”고 말했다. 노키아가 내년 2월 평창올림픽 때 한국 KT·삼성전자, 미국 인텔, 스웨덴 에릭슨 등과 함께 5세대(5G) 이동통신 시범서비스를 선보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노키아는 KT가 주도해 만든 한국 첫 5G 표준인 ‘평창 5G 규격’을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5G는 데이터 전송속도가 현재의 4G보다 1000배 이상 빠른 서비스다. 100배 이상 더 많은 기기를 동시에 연결할 수 있고 데이터 끊김도 1000분의 1초로 현재의 10분의 1로 단축된다. 지금보다 수백 배 많은 전자기기가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이나 데이터 사용량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실시간 가상현실(VR) 중계 같은 서비스는 5G가 아니고선 실현이 불가능하다. 세계 각국 통신·장비 업체가 5G 표준 선점에 혈안이 돼 있는 이유다.

노키아가 내년 2월 평창올림픽에서 가상현실(VR) 중계에 활용할 360도 입체 카메라 오조(OZO). [노키아]

노키아가 내년 2월 평창올림픽에서 가상현실(VR) 중계에 활용할 360도 입체 카메라 오조(OZO). [노키아]

2013년 휴대전화 사업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하고 스마트폰 시장에서 철수했던 노키아가 불과 4년 만에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오울루 대학의 아르노 파르시넨 교수는 “비롯 스마트폰 시장에선 참패했지만 스마트폰을 연결하는 네크워크 장비 시장으로 발 빠르게 옮긴 전략이 주효했다”며 “특히 노키아가 단시간 내에 5G 이동통신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핀란드만의 끈끈한 산학협력 덕분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노키아의 5G 이동통신 시험망(테스트베드)은 알토대학 및 오울루 대학과 실시간 연결돼있다. 노키아 연구원은 물론이고 대학 교수나 학생도 5G 관련 기술이나 장비를 4개의 시험망에서 자유롭게 테스트해볼 수 있다.

파르시넨 교수는 “오울루는 19세기부터 바다를 통한 무역이 발달해 도전적이고 개방적이었다”며 “실제 산업에 응용할 수 있는 실용 공학이 발달해 1년에 절반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절반은 노키아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가 흔하다”고 소개했다.

헬싱키의 ‘알토대학 산업인터넷 캠퍼스(AIIC)’. 이곳에선 산업에 응용할 IOT 기술을 주로 연구한다. 교실엔 기계 제작장비가 빼곡하고 천장엔 크레인이 달렸다. 제조업 공장과 달리 이곳 장비는 모두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다.

헬싱키 알토대학 산업인터넷 캠퍼스(AIIC) 스마트 크레인 앞에서 장비를 설명하는 야리 유한코 교수. [사진 정경민 기자]

헬싱키 알토대학 산업인터넷 캠퍼스(AIIC) 스마트 크레인 앞에서 장비를 설명하는 야리 유한코 교수. [사진 정경민 기자]

크레인은 글로벌 크레인회사 코네크레인이 설치해줬다. 장비는 스위스 제조업체 ABB가, 인터넷망 연결은 노키아가 맡았다. AIIC 야리 유한코 교수는 “1학년부터 박사과정까지 모든 학생과 기업 연구원이 IOT 응용 기술이나 장비를 이곳에서 시험한다”며 “졸업생은 바로 산업현장에서 투입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대학에서부터 상용화가 가능한 기술 개발에 주력하다 보니 연구실에서 탄생하는 스타트업도 흔하다. 통신회사를 거치지 않고도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한 ‘쿠무코레(Cumucore)’도 알토대학 연구실에서 창업했다.

알토대학 연구실에서 창업한 스타트업 쿠무코레 홈페이지.

알토대학 연구실에서 창업한 스타트업 쿠무코레 홈페이지.

지도교수이자 창업자인 호세 코스타레케나 교수는 알토대학과 노키아에서 15년 넘게 일한 엔지니어다. 코스타레케나 교수는 “함께 연구해온 동료 교수 한 명과 박사 후 과정 학생 세 명이 창업했다”며 “우리가 따낸 특허는 처음엔 학교 소유였지만 창업과 함께 거의 무상으로 우리 회사로 이전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학교는 많은 스타트업이 나올 수 있도록 연구 장소와 여건을 지원할 뿐 특허권이나 스타트업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고집하지 않는 게 핀란드의 문화”라고 덧붙였다.

핀란드 스타트업 붐 밑거름 된 노키아 브릿지 프로그램

석유시추선 플랫폼에 불이 났을 때 살아남은 건 거친 바다로 뛰어든 사람뿐이었다.

기울어가던 노키아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마이크로소프트(MS) 출신 스티븐 엘롭 최고경영자(CEO)가 2011년 초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노키아의 휴대전화 운영체제(OS) ‘심비안’은 전성기 세계시장의 62.5%를 차지했다. 이에 도취해 애플 iOS와 구글 안드로이드의 도전을 얕봤던 노키아의 무사안일주의를 꼬집은 말이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불타는 플랫폼’ 경고로 회자되기도 했다.

노키아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할 당시 최고경영자를 맡았던 스티븐 엘롭.     [노키아]

노키아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할 당시 최고경영자를 맡았던 스티븐 엘롭. [노키아]

그러나 심비안을 버리고 MS 윈도우로 갈아탄 그의 플랫폼 개혁은 도리어 노키아의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을 33%에서 3%로 곤두박질하게 만든 패착이 됐다. 결국 2013년 9월 휴대전화 사업을 MS에 매각할 때까지 노키아는 2011년 1만1000명, 2012년 1만명 등 2만4000여명을 감원해야 했다.

감원 폭풍 직전이었던 2011년 4월 노키아는 ‘브릿지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감원 대상 임직원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대상은 핀란드는 물론 세계 13개국 지사의 전 임직원이었다. 창업을 원하는 직원에겐 1인당 2만5000유로(약3400만원)를 지원했다. 팀을 이루면 최대 4명까지 지원해 한 스타트업이 10만 유로를 받을 수 있었다.

노키아의 브릿지 프로그램

노키아의 브릿지 프로그램

심사를 통과한 창업자가 은행에서 대출 받을 땐 보증도 서줬다. 노키아가 보유한 기술이나 노하우를 전수한 건 물론이다. 특히 노키아가 포기한 OS였던 심비안과 미고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창업을 선택한 직원의 평균 연령은 35~54세였다. 이중 회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었던 사람은 10%도 안 됐다. 그럼에도 2014년까지 브릿지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스타트업은 1000여개에 달했다.

핀란드 헬싱키 에스푸의 노키아 본사 건물. 왼쪽 벽으로 입주한 벤처기업 기업 간판이 보인다. [사진 정경민 기자]

핀란드 헬싱키 에스푸의 노키아 본사 건물. 왼쪽 벽으로 입주한 벤처기업 기업 간판이 보인다. [사진 정경민 기자]

한나 마르티넨디킨스핀프로 ICT 국장은 “노키아에서 독립한 스타트업은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데다 노키아의 방대한 네트워크까지 활용할 수 있어 생존율이 높았다”며 “노키아 추락으로 침체한 핀란드 경제에 숨통을 틔워줬다”고 설명했다.

헬싱키 카라포르티의 노키아 캠퍼스엔 당시 창업한 벤처기업들이 즐비하다. 노키아 5G 인터넷 개발에 핵심인 네트워크 관리 기술을 보유한 ‘클라우드스트리트(Cloudstreet)’도 2013년 창업했다. 설립자 미카 스카르프는 “소기업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고가의 테스트 장비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첨단 기술 개발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람 육안에 가까운 초고해상도의 가상현실(VR) 디스플레이 장비를 공개해 화제가 됐던 ‘바르요(Varjo)’ 유시 매키넨 마케팅 책임자는 노키아 출신이다.         [사진 정경민 기자]

사람 육안에 가까운 초고해상도의 가상현실(VR) 디스플레이 장비를 공개해 화제가 됐던 ‘바르요(Varjo)’ 유시 매키넨 마케팅 책임자는 노키아 출신이다. [사진 정경민 기자]

지난 6월 사람 육안에 가까운 초고해상도의 가상현실(VR) 디스플레이 장비를 공개해 화제가 됐던 ‘바르요(Varjo)’도 노키아와 MS 기술진이 창업한 회사다. 노키아를 거쳐 온라인 게임회사 로비오에서 ‘앵그리버드’ 브랜드 마케팅을 맡았던 유시 매키넨 마케팅 책임자는 “바르요의 가상현실 기술은 미국에서도 앞선 전례가 없어 4개월 만에 특허를 받았다”며 “내년 상용화가 목표”라고 말했다.

핀란드 헬싱키=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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