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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미치광이는 너야 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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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 사의를 표한 닉슨은 백악관 잔디정원에 대기 중이던 ‘마린 원(대통령 전용 헬기)’의 트랩에 올라섰다.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 배웅 나온 300여 명의 백악관 직원, 각료를 향해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였다. 대통령직 종료까지 불과 2시간. 이 모습을 지켜보며 가장 가슴을 쓸어내린 이는 바로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닉슨의 뒤에 ‘풋볼(핵 코드가 든 검은 가방) 장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슐레진저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전군 주요 지휘관에게 긴급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닉슨이 핵 발사를 명령하면 나 또는 국무장관(키신저)에게 반드시 확인하라.” 퇴임을 앞두고 술에 절어 살았던 ‘미치광이’ 닉슨이 마지막 순간 뭘 할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 닉슨은 그 무렵 헤이그 비서실장에게 “풋볼 공 가져와 봐. 의사당에 그걸(핵폭탄) 떨어뜨려 볼까”란 발언을 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트럼프 김정은 ‘미치광이 경쟁’ 점입가경 #조연 역할 해야 할 우리 정부는 어리바리

43년 전 슐레진저 국방장관의 심정이 바로 지금 매티스 국방장관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처음에는 전략적으로 ‘미치광이’인 척하는 것 같던 트럼프의 요즘 언행을 보고 있으면 이제 진짜로 일을 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돌발적 트위터나 기자와의 문답도 아닌, 준비된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닉슨은 술에 취해 그랬다지만 트럼프는 맨정신에 그러니 더 무섭다. 더 큰 문제는 43년 전엔 ‘미치광이’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두 명이란 점. 1주가 멀다 하고 핵실험과 미사일을 쏴대는 김정은과의 “미치광이는 너야 너~”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의 예측 시나리오 두 가지. 첫째로 세컨더리 보이콧 본격 가동과 북한의 수소폭탄 태평양 발사로 군사충돌 일보직전까지 간 뒤 중국이 중재에 나설 것이라는 것이다. 북·미 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로드맵이 진행되고 IMF는 바로 북한에 들어가 국가채무 파악에 나서는 시나리오다. 둘째는 더 나아간 경우. 북·미 간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고 트럼프가 결국 한반도 내 20만여 명에 달하는 미국인에게 철수 명령을 낸다. ‘협상용’이지만 전쟁위기 고조로 한국에선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트럼프는 적어도 1~2년 철수조치를 풀지 않을 것으로 본다. IMF가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외교에 마술은 없다. 모자 속에서 토끼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누군가 모자 속에 토끼를 넣어야 한다. 미·중 간 24년 적대관계를 청산한 72년 ‘상하이 선언’ 당시 토끼를 집어놓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미치광이 닉슨이었다. 조연은 키신저. 닉슨과 키신저는 무려 8일간 중국에 머물며 “합의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45년이 지나 이번엔 ‘미치광이’ 트럼프가 모자 속에 토끼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린 조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주연도 주연이지만 조연 또한 뭔가 어리숙하다. 800만 달러 대북 인도적 지원을 발표하곤 “시기는 추후 결정한다”고 한다. 이런 걸 두고 죽도 밥도 아니라고 한다. 하려면 소신있게 밀고 나가거나 아님 아예 발표를 뒤로 미루면 될 일이었다. 한·미·일 공조에 균열만 내고 의심만 샀다. 한·미·일 정상회담에서의 대화를 악의적으로 보도한 일 언론도 문제지만,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핵심을 짚지 못하고 “백악관 내에 문재인 팬클럽이 생겼다”로 맞불 놓는 청와대 행태도 소아적이고 아마추어다. 주연도, 조연도 참으로 기대난망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