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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더럽고 힘든 농사? 양복 입고 폼나게 … 일본 신세대 농부 역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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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본 ‘슈트 간지’ 사이토의 특별한 귀농

18일 올해 첫 벼수확을 한 사이토. 코듀로이 새 양복을 빼입었다.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농사도 자동화시대가 됐다. [사진 페이스북]

18일 올해 첫 벼수확을 한 사이토. 코듀로이 새 양복을 빼입었다.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농사도 자동화시대가 됐다. [사진 페이스북]

일본 동북지역 한가운데 위치한 야마가타(山形)현 가와니시(川西)마을에 사는 사이토 기요토(斎藤聖人·29). 말끔하게 다림질한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양복 상의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그가 매일 아침 향하는 곳은 논이다.

‘답답하고 가난한 농촌’ 편견 깨고 #즐겁고 멋있는 일 보여주려 시도 #처음엔 어른들에게 혼도 났지만 #정장 차림 트랙터 몰고 모내기 #브랜드 쌀, 양복 모양 포장지 개발 #청년 농부 모임 ‘파머즈5’도 결성 #다양한 인생 즐기는 환경 만들어 #젊은 층 돌아오는 농촌 되게 할 것

‘슈트농가 사이토군’으로 불리는 그는 양복차림으로 농사를 짓는 신세대 농부로 유명하다. 모내기를 하거나 트랙터를 운전할 때, 벼를 수확할 때 언제나 정장 차림이다. 그런 사이토를 최근 e메일 인터뷰했다.

“저희 집안은 지금 이곳에서 300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농가입니다. 저도 어릴 땐 따분한 농촌이 지겨워 도시생활을 꿈꿨죠.” 열여덟에 고향에서 공업고등학교(건설과)를 졸업한 사이토는 인근 도시인 미야기현 센다이시의 2년제 건축 전문학교를 마치고 도쿄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생활에 지쳐 고향에 돌아온 것도 잠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자 고향을 또다시 등졌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계기는 결혼이었다.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내와 아이를 낳아 기를 곳이라면 고향이 좋겠다 생각해 2013년 귀농했다”고 말했다.

‘집안에 복을 부르는 쌀’을 들고 선 사이토. [사진 페이스북]

‘집안에 복을 부르는 쌀’을 들고 선 사이토. [사진 페이스북]

일본의 농촌 사정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농촌지역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비율은 39.7%에 달한다(일본 농림수산성 2016년 통계, 한국은 같은 기간 40.3%). 여기에 전통적으로 농사일은 더럽고 힘들고, 가난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즐겁게 일하는, 멋진 농부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의 형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라면 양복 입고 농사를 지을 텐데.”

2013년 5월 모내기를 시작하며 처음 양복을 입었다. “처음엔 가족들이 ‘누구 결혼식에 가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모두 황당한 반응이었죠.” 할아버지는 “지금 당장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지 못하냐!” 호통을 쳤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뜻을 따르고 지지해줬다. 지금은 6벌의 양복을 번갈아 입고 있다. 물세탁이 가능한 제품을 구입해 직접 빨아 입는다.

“처음엔 제 멋에, 남들과 다른 농부가 되고 싶어 양복을 입기 시작했죠. 하지만 농촌생활을 하다보니 고령화문제와 이에 따른 젊은 인력의 부족, 젊은 층의 쌀소비 감소 등 일본 농업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현재 그가 쌀을 경작하는 면적은 15ha(약 4만5000평). 겸업 농부인 아버지는 주말에만 작업을 하고, 평일엔 사이토 혼자 농사일을 한다. 주변 농가 어르신들이 고령으로 은퇴를 하면서 매년 경작면적은 늘어나고 있다.

18일 올해 첫 벼수확을 한 사이토. 코듀로이 새 양복을 빼입었다.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농사도 자동화시대가 됐다. [사진 페이스북]

18일 올해 첫 벼수확을 한 사이토. 코듀로이 새 양복을 빼입었다.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농사도 자동화시대가 됐다. [사진 페이스북]

“농촌의 세대교체는 불가능한 걸까. 농촌문화를 바꾸고, 젊은 사람들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 할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는 그는 몇 가지 생각들을 실천에 옮겼다.

먼저 오리지널 브랜드 쌀을 만들었다. 사이토가에는 대대로 농기구에 가부(蕪·순무) 인장을 찍어 표시를 했다. 고향 동네에서는 ‘가부’를 ‘가부라’라고 부르는 데 착안해 ‘집안에 복을 부르는 쌀(가부라쌀·家福來米)’이라는 뜻의 네이밍을 했다. “친한 디자이너의 도움으로 쌀 포장지도 양복 모양을 넣어 제작했습니다. 한눈에 양복쟁이 농가가 만든 쌀이라는 걸 알 수 있게.” 젊은 농부답게 온라인과 SNS를 이용한 주문판매에도 적극적이다.

이웃의 젊은 농부들과 결성한 ‘파머즈5’. 사이토는 레드(가운데)를 맡았다. [사진 페이스북]

이웃의 젊은 농부들과 결성한 ‘파머즈5’. 사이토는 레드(가운데)를 맡았다. [사진 페이스북]

또 다른 프로젝트는 자신과 같은 젊은 농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이다. ‘JA(전국농업협동조합연합회) 야마가타 오키타마 청년부 가와니시지구 고마쓰지부’ 회원들과 독수리 5형제와 같은 ‘파머즈5’ 팀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리더격인 ‘레드’를 맡고 있다. “청년들의 치기어린 장난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모임”이라고 했다. 처음엔 홍보활동이 많았는데, 지금은 농사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농촌 운영에 관한 젊은 농부들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새로운 벼 품종을 비교 실험하는 자리도 마련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재배한 농산물로 뷔페식단을 차려 소비자들을 직접 찾아가는 행사도 갖는다.

트레이드마크인 양복 모양을 넣은 쌀 포대. [사진 페이스북]

트레이드마크인 양복 모양을 넣은 쌀 포대. [사진 페이스북]

사이토가 생각하는 농업의 가장 큰 매력은 자율성이다. 날씨나 병충해 등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형태로 생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재배한 건강한 농산물이 사람들 식탁에 오르고, 사람들에게 건강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덤이다.

“젊은 농부들의 아이디어로 농촌이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농사가 주축이 되겠지만, 그게 농촌생활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농촌에서도 다양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청년 농부의 바람이다.

[S BOX] 일본 양복 ‘세비로’ … 런던 ‘섀빌로’ 거리서 유래설

일본에 처음 양복이 소개된 건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무렵이다. 당시 양복을 입을 수 있었던 건 일부 부유층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양복은 군복으로 대중화됐다. 양복은 일본어로 ‘세비로(背廣)’다. 세비로의 어원과 관련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영국 런던의 고급 맞춤신사복을 파는 ‘섀빌로’ 거리의 이름을 따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깔끔하면서도 성실한 인상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은 ‘직장인=양복 차림’의 등식을 고집했다. 유난히 습하고 더운 일본의 여름철은 양복을 입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본 양복업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쿨 비즈(Cool Biz)다. 일본 정부가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 대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쿨비즈는 여름철 노타이, 폴로셔츠 차림의 캐주얼한 옷차림을 장려하는 캠페인이었다. 의류업계는 자외선을 차단하고 얇고 통풍이 잘되는 소재를 사용해 다양한 색상, 심지어 짧은 소매 재킷이라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양복까지 내놨다.

지난달 작고한 하타 쓰토무(羽田孜) 전 총리는 쿨비즈가 도입되기도 전인 1990년대 중반 총선 유세장에서 이미 짧은 소매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이후 짧은 소매 양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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