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미워할 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월간중앙 기자

전수진월간중앙 기자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 내가 내리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누르는 아저씨, 오늘도 있다. 괜한 심술에 슬로 모션으로 내리는 나도 참, 한심하다. 퇴근 버스 안, 진분홍색 커버를 씌운 임산부 석에 앉은 쩍벌 어르신도 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분홍 커버가 시력 저하로 안 보이시나. 이런 생각하는 나도 참, 못됐다.

그래도 이제 웬만하면 “어린 게 뭘 아냐”는 얘기는 안 들을 나이가 돼서 그런지, 달라진 게 하나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남도, 쩍벌 어르신도, 뭔가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다. 인간적으로 성숙해서가 아니다. 자신감이 없어져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내가 저 사람을 몰아붙일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어려울 따름이다.

이런 나는, 240번 버스 기사를 대하는 대다수 네티즌들의 순도 100% 증오가 놀라웠다. 울부짖는 엄마와 네 살배기 아이를 이산가족으로 만든 비정한 운전 기사. 이 프레임에 네티즌들은 신기할 정도로 한 톨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니, 너는 나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식이다. 독일 언론인 카롤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증오에는 절대적 확신이 필요하다”고 설파한 그대로다.

엠케는 사람들이 타자를 증오하게 되는 이유로 “경솔한 순진성”을 들었지만, 대한민국 네티즌들에게선 거기에 더해 외로움도 읽혔다. 뭘 해도 살기 힘든 세상, 공공의 적이라도 만들어 화풀이라도 하고 싶다는 심리가 아닐까. 그래도 방법론이 틀렸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권리, 미움을 분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까.

정작 위로가 필요한 건 “극단적 선택까지도 생각했다”는 버스 기사다. 길을 걸을 때면 행인들이 모두 그를 몰아붙인 네티즌들로 보일 터다. 꿋꿋이 버티시길.

스오 마사유키(周防正行) 감독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몰려 유죄가 된 무고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부디 당신이 심판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저를 심판해 주시기를.” 절대선도 절대악도 이 세상엔 없다. 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엘리베이터 버튼은 사람이 내리고 난 뒤 누르시길.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