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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1년]②영광굴비거리 "계수기로 돈 세던 시절은 옛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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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4시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 추석 연휴를 앞두고 손님들로 북적여야 할 거리는 한산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주문으로 가게마다 택배 상자에 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예년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전남 영광 법성면 굴비거리 가보니 #추석 연휴 앞두고도 손님 없어 한산 #관광객도 굴비백반만 먹고 굴비 안사 #김영란법 여파로 매출은 반토막 줄고 #가격 낮추려 재포장하느라 일은 두 배 #인건비 아끼려 가족이 매달리는 구조 #참조기 어획량 줄어 가격 올라 이중고 #영광군, 굴비 살리기 나섰지만 역부족 #정치권도 법 적용 완화 등 개정 움직임

관광버스 한 대가 굴비거리에 멈추더니 60~70대로 보이는 남녀 관광객 20여 명이 한 굴비가게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들은 10분도 안 돼 가게를 빠져 나갔다. 하지만 굴비세트를 산 사람은 2명뿐이었다. 굴비 상자를 손에 든 60대 여성은 "근처 (영광 불갑산)상사화축제를 보러 온 김에 14만원짜리 굴비 한 세트를 샀다"고 말했다. 기자가 '선물용이냐'고 묻자 그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때문에 (굴비 선물하면) 큰일 난다. 집에서 먹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수산'이라고 적힌 다른 가게 안에는 50대 부부가 파리채를 든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남편 A씨는 "예전엔 공무원들이 주고객이었는데 김영란법 이후론 굴비를 거의 안 사간다"며 "선물을 받는 사람이 없는데 선물을 살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경섭(54)씨가 운영하는 '미가굴비'도 2대째 80여 년 이어온 굴비가게다. 그는 "참조기 물량이 적어 2년 만에 단가가 50% 오른 데다 김영란법 때문에 소비가 위축돼 1년 만에 매출이 30% 줄었다"고 말했다.

18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18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영광군에 따르면 영광굴비 판매액은 2015년 3500억원에서 지난해 3000억원으로 15%가량 줄었다. 지난 1월 설 대목 매출은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해 같은 기간(1200억원)보다 35% 줄어든 780억원이었다. 올해 설 굴비 판매량(택배 물량 기준)도 5075t으로 지난해(7808t)보다 35% 줄었다. 지난 2011년 5만9000t에 달했던 국내 참조기 어획량도 해마다 줄어 지난해 1만9000t으로 떨어졌다. 2011년 100마리(14㎏) 기준 40만원이었던 원물 가격이 올해는 70만원 가까이 올라 굴비업계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이가네 경성굴비' 가게 안에서는 직원들이 10마리씩 묶인 굴비를 일일이 풀어 5마리씩 다시 포장하고 있었다. 기자가 '장사가 잘 되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가게 주인 이경률(37)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씨는 "10마리 한 묶음이 7만원이어서 김영란법에 안 걸리게 반으로 쪼개 3만5000원에 팔고 있다"며 "매출은 줄고 일은 두 배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굴비 가격은 크기에 따라 20마리에 1만원부터 10마리에 1백만원까지 다양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5만원짜리 이하 세트가 제일 많이 나간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50여 년 전 부모님이 시작한 굴비가게를 2002년 물려받은 그는 "인건비라도 아끼려고 원래 있던 직원 2명을 내보내고 어머니와 아내 등 식구 4명이 달라붙어 가게를 꾸리고 있다"고 했다.

18일 관광객들이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있는 '남양굴비'에서 굴비를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18일 관광객들이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있는 '남양굴비'에서 굴비를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물건 좋아요. 맘에 안 들면 100% 환불돼요. 한 마리 드셔도 교환됩니다. (굴비) 살이 두꺼워서 짜진 않아요."
주문 전화를 받는 '남양굴비' 대표 이광용(46)씨의 목소리엔 생기가 돌았다. 고객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이씨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굴비거리에서 뜨내기 손님은 거의 없다. 오랫동안 품질과 서비스를 믿고 거래하는 단골 장사가 대부분이라 주문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선대 때부터 3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이씨도 영광굴비의 전성기를 누렸다. 명절 때는 하루 매출만 3000만원이나 돼 계수기로 돈을 세던 호시절이었다고 한다. 이씨는 "굴비가 잡히는 봄과 설·추석 양대 명절 장사로 1년을 먹고 사는데 요즘은 명절에도 하루 매출이 200만~300만원 수준이고 이마저도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했다.

그는 "예전부터 굴비 매출은 하향세였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가속도가 붙은 격"이라며 "그나마 규모 있고 장사가 잘 되는 집은 매출이 20~30% 떨어졌지만 나머지 소규모 영세 업체는 50%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매출이 준 만큼 마진(중간 이윤)도 줄었다. 이씨는 "옛날엔 5만원짜리를 팔면 2만5000~3만원이 남았는데 요즘은 택배비(4000원)를 빼면 1만원도 안 남는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손님에게 가격을 깎아주는 에누리나 덤을 끼워주는 서비스도 거의 사라졌다. 그는 "예전엔 단골들에게 병치나 서대 등 다른 마른 반찬도 한 박스씩 줬는데 지금은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18일 관광객들이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있는 '남양굴비'에서 굴비를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18일 관광객들이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있는 '남양굴비'에서 굴비를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씨는 "관광버스가 와도 관광객들이 '굴비거리구나' 하고 굴비백반만 먹고 굴비는 안 사간다"며 "굴비거리는 이제 쇼핑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거쳐가는 곳이 됐다"고 말했다. 굴비만 팔아선 가게 유지가 어려워지자 이씨는 얼마 전부터 굴비세트에 들어가는 얼음팩 만드는 일까지 '투잡(two-job)'을 뛰고 있다. 그는 "지난해 김영란법 여파로 굴비가 안 팔려 얼음팩 매출도 같이 떨어졌다"면서도 "김치나 고등어 등 다른 거래처를 뚫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란법의 여파는 굴비거리에 있는 다른 건어물 가게에도 미쳤다. '법성포건어물수산물센터' 앞에서 이선만(58)씨가 장어와 서대·농어 등 말린 생선을 자판에 놓고 팔고 있었다. 이씨가 배에서 직거래한 생선들을 직접 포를 뜨고 해풍에 말린 것들이다. 이씨는 "예전엔 굴비 사러 왔다가 다른 건어물도 많이 사갔다"며 "남태평양에서 잡힌 이 장어가 한 마리에 3만원인데 손님들이 김영란법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선뜻 두 마리는 안 사간다"고 말했다.

한 상인이 굴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한 상인이 부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경기는 안 좋지만 굴비거리 상인들은 여전히 매일 오전 6시에 열리는 영광수협 경매에 참여한다. 영광 근해에서는 참조기 씨가 말라 대부분 제주도 앞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이다. 지난 16일 기준 참조기 경매 단가는 100마리(14㎏ 기준)에 63만~67만5000원이었다. 굴비 상인들은 160~180마리(14.5㎏ 기준)를 제일 선호한다고 한다. 같은 날 참조기 경매 단가는 160마리가 27만~29만5000원, 180마리가 18만~19만원이었다. 상인들은 참조기를 가져오면 영광군 염산면과 백수읍에서 나는 소금을 몸과 아가미·입 등에 뿌리고 바닷바람에 말려 영광굴비를 만든다. 한 굴비 상인은 "옛날엔 목포 배는 목로로 들어가고, (영광) 법성 배는 법성으로 들어갔는데 요즘은 참조기 물량이 적다 보니 지역 수협끼리 가격을 높이는 등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고 귀띔했다.

굴비업계에 따르면 요즘은 참조기 물량이 적고 가격도 올라 '보리굴비'라 불리는 부세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부세는 참조기와 같은 민어과의 바닷물고기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부세가 참조기보다 크다. 부세를 말리는 과정은 굴비와 똑같다고 한다. 부세는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지만 영광군에서는 부세 판매량 등을 따로 집계하고 있지는 않다. 영광 굴비거리에서 부세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선 상인마다 엇갈렸지만 "부세가 굴비를 보완하는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엔 이견이 적었다.

'남양굴비' 이광용 대표가 굴비(왼쪽)와 부세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남양굴비' 이광용 대표가 굴비(왼쪽)와 부세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영광에는 현재 굴비 관련 단체가 영광굴비특품사업단·영광굴비조합·영광굴비정보화마을·영광굴비사업자조합 등 4개가 있다. 영광군에 따르면 한때 500개가 넘던 굴비가게는 2015년 496개에서 지난해 466개로 줄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1개가 준 465개로 조사됐다.
강철 영광굴비특품사업단장은 "작년과 올해 법성포에서 제일 큰 굴비가게 2곳이 부도가 났다"며 "아직까진 가게마다 그간 번 돈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버티고 있지만 김영란법이 장기간 유지되면 폐업하는 업체가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광군은 올해 115억원을 확보해 2021년까지 '굴비산업 발전 5개년 계획'을 세워 영광굴비 살리기에 나섰다. 참조기·부세 양식 및 종묘 방류사업 확대와 굴비 가공·유통 시설 개선, 해외 수출시장 개척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김준성 영광군수는 "농축수산물에 대한 법 적용 완화 등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김영란법 선물 적용 대상에서 농축수산물을 제외하거나 일부 품목이라도 빼는 방안, 선물 가액 기준(5만원)과 식사 가액 기준(3만원)을 각각 10만원과 5만원으로 올리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앞서 전남도지사 시절 "김영란법의 취지 자체엔 공감하면서도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정책이 정당화되려면 서민의 피해를 없애야 한다"며 정부에 법령 개정을 건의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김영란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영광=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18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18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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