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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카 시대’ 가고 ‘전기차 시대’ 왔다…한국만 레이스 낙오 우려

중앙일보

입력

‘수퍼카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올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오늘 밤 주인공”이라는 평을 받은 이들은 수억원짜리 럭셔리카도, 1000마력에 달하는 힘을 자랑하는 수퍼카도 아닌 전기차였다.
좋은 연비와 친환경 두 마리 토기를 잡겠다며 클린 디젤에 매달렸던 ‘독일 3총사’ 벤츠ㆍBMWㆍ아우디-폴크스바겐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장 많은 전기차로 무대를 꾸몄다. 차종도 소형부터 대형 세단, 나아가 고성능 스포츠 레이싱카에 이르기까지 가솔린ㆍ디젤엔진이 아닌 배터리를 달고 나타났다.
업체들 뿐 아니다. 국가들도 정책적으로 ‘가솔린ㆍ디젤 엔진의 종식’을 선언하고 있다. 친환경 정책에 앞서가던 유럽 국가들 뿐 아니다. 한국보다 자동차기술에서 훨씬 뒤졌다고 생각했던 중국마저도 2040년부터 이 대열에 참여하려 하고 있다. 바야흐로 전기차 기술 없이는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논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누가 전기차를 죽였나(Who Killed the Electric Car)’
2006년 선댄스 영화제를 빛낸 크리스 페인 감독의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1996년 출시한 전기차 EV1의 험로를 담았다. 이 자동차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되는 다큐멘터리에서 페인 감독은 경제적 가치가 있고 미래 지향적이었던 EV1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자신의 산업을 보호하려는 거대 정유사와 엔진 오일 제조회사들이 정치권에 로비를 펼쳐 배기가스 규제법을 철회하게 하고 친환경차 지원책을 막은 때문이라는 게 결론이다. 결국 GM은 1999년까지 총 1117대가 캘리포니아에서 팔렸던 EV1를 수거해 폐차장에 보내야했다.

페인 감독은 5년 뒤인 2011년 전기차를 주제로 한 또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내놓았다. ‘전기차의 복수(Revenge of the Electric Car)’. GM의 흑역사를 바탕으로 테슬라라는 복수의 화신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일약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다.
거세게 전기차의 성장을 막아섰던 정유업계는 물론 환경문제에 별로 민감해하지 않던 국가들도 더 이상 이 변화를 거부할 수 없게 됐다.

영국ㆍ프랑스ㆍ인도 앞다퉈 “2025∼2040년 가솔린ㆍ디젤차 종식” 선언 # 독일 ‘디젤 3총사’ 폴크스바겐ㆍ벤츠ㆍBMW, 전기차 브랜드로 탈바꿈 중 # 세게 최대 자동차 판매시장 중국 업체들, 정부 지원 업고 급성장 # “한국, 주목받는 전기차도 정부 정책도 찾아볼 수 없어”

세계 자동차 최대 시장으로 성장한 중국마저도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선 지난해 신차가 약 2803만대나 팔렸다. 전세계 판매량(약 8400만대)의 3분의 1이나 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중국 공업정보화부의 신궈빈(辛國斌) 부부장(차관)이 지난 9일 톈진(天津)에서 열린 ‘2017 중국 자동차산업발전 국제포럼’에서 화석연료 자동차의 생산ㆍ판매를 중단하기 위한 일정표를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이미 중국은 지난해 순수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차를 합쳐 53만 6000대의 전기차가 팔리면서 이 부분 판매 1위국으로 올라섰다. 전체 차 중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9%로 8위에 마크됐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가솔린과 디젤차의 생산과 판매에 제약을 가하게 되면 그 파장은 전 세계 자동차업계에 엄청나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미 상당수 국가들은 가솔린·디젤차 생산을 중단하는 ‘알람 시계’를 2025∼2040년에 맞춰놨다. 2040년이 되면 영국ㆍ프랑스ㆍ인도ㆍ노르웨이에서는 가솔린ㆍ디젤차를 아예 살 수 없다.
세계 인구 2위국인 인도의 니틴 가드카리 도로교통부장관은 지난 7일 인도자동차제조협회(SIAM)가 주최한 행사에서 2030년부터는 인도에서 전기차만 판매되도록 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재강조했다. 가드카리 장관은 “가솔린ㆍ디젤 등 기존 화석연료의 대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면서 “이를 (정부가) 기업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밀어붙일 것”이라고 말해 정부의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해 피유시 고얄 석탄ㆍ석유ㆍ신재생에너지부 장관도 ‘2030년까지 100% 전기차’라는 정부 목표를 밝힌 바 있다.
영국은 지난 7월 2040년부터는 가솔린ㆍ디젤 차량의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에선 지난해 310만대의 신차가 팔렸다. 전기차는 4만1000대가 새로 등록됐다. 프랑스 정부도 2040년부터 가솔린ㆍ디젤 차량를 팔 수 없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 이후부터는 전기나 기타 청정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만 팔 수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2020년까지 전기차를 100만대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달 화석연료 자동차 판매 금지 시한에 대해 “정확한 시기를 정할 수는 없지만 영국ㆍ프랑스 등 이웃 국가의 방향은 옳다고 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가장 확실한 목표를 세웠다. 2025년에 판매되는 승용차와 밴은 탄소 배출이 없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노르웨이는 현재도 전세계에서 전기차의 비중이 가장 큰 국가다. 지난해 팔린 20만여 대 중 4만5000대 정도가 전기차로 23%에 달했다. 2위인 아이슬란드(4.7%)와도 큰 차이를 보였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이들 나라 외에 오스트리아, 덴마크, 아일랜드,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전기차 판매 국가 목표를 설정했다. 미국은 연방 차원의 정책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8개 주가 목표를 갖고 있다.

반면 자동차 생산량 6위국인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존재감이 없다. 글로벌 친환경 정책에 걸맞는 화석연료 사용 제한 시점 발표는 고사하고 전기차 보급 계획도 초라하다. 문재인 정부는 문 대통령 임기(2022년) 내에 35만대까지 전기차 보급을 늘린다는 목표를 밝혔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7월 19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통해 발표한 내용이다. 이는 올 상반기 국내 자동차등록대수(2200만대)를 기준으로 보면 1.5%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 반응이 많다.
우선 전기차의 보급 확대를 위한 충전 인프라가 큰 문제로 지적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한국 내에 설치된 전기 충전소는 지난 8월 30일 기준으로 1992개에 불과하다. 일반 주택에서도 충전할 수 있겠지만 전기요금 누진제와 전용케이블 설치 문제가 걸림돌이다. 특히나 아파트 주거문화가 발달해 수많은 차들이 주차장에 몰려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정식 충전은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하는지 뚜렷한 방책이 없다.

무엇보다 국내 자동차업체들의 기술력과 의지가 해외 업체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게 문제다.
올 프랑크푸르트 모터쇼가 각 브랜드들의 ‘전기차 자랑’ 자리였던 데 반해 현대ㆍ기아차는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차량을 선보이지 못했다.
특히 최근 배출가스절감장치 조작 사건인 ‘디젤 게이트’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우디-폴크스바겐과 벤츠, 그리고 BMW가 부스를 전기차들로 장식하면서 전기차 선두주자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아우디-폴크스바겐 그룹은 전기차 전략인 ‘로드맵E’를 발표했다. 2025년까지 80종 이상의 전기차를 쏟아내겠다는 전략이다. 이후 2030년까지 그룹 전 브랜드를 통틀어 약 300개 차종 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전기차 모델이 나올 수 있도록 목표치를 높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약 27조원을 투입한다.
이번 모터쇼에는 금명간 양산을 앞두고 있는 ‘ID 크로즈’를 앞세웠다.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으로 1회 충전 주행거리가 약 500㎞에 이르며 급속 충전기로 30분이면 80% 충전이 가능하다.

벤츠는 전기차 브랜드 EQ의 첫 소형 콘셉트카인 ‘EQ A’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2020년 양산이 목표로 테슬라 ‘모델3’, 닛산 ‘리프’, 쉐보레 ‘볼트EV’와 경쟁할 전망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브랜드를 소유한 다임러 AG의 디터 제체 회장은 “2022년까지 메르세데스-벤츠의 모든 차종별로 한 모델은 전기구동화 모델이 되도록 하겠다”며 “전체적으로는 총 50개 이상의 전기차를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벤츠의 소형차 브랜드 ‘스마트’는 모든 차종을 전기차로 바꾼다. 그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2020년까지 전기차 브랜드로 탈바꿈 시키겠다”며 13조6000억원을 전기차 부문에 투자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모터쇼에서 소형차 브랜드 미니(MINI)의 전기차 ‘일렉트릭 콘셉트’를 선보인 BMW는 앞으로 럭셔리 브랜드인 롤스로이스에도 브랜드 최초로 전기 동력계를 얹겠다고  전했다.

업체들 중 이미 전기차만을 만들고 있는 테슬라를 제외하면 스웨덴계 볼보가 가장 혁명적 선언을 했다. 아예 내후년인 2019년부터 전기차만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의 재규어 랜드로버도 자사의 모든 모델에 전기차를 추가하겠다고 지난 7일 발표했다. 랄프 스페스 최고경영자(CEO)는“우리 모든 모델에 순수 전기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마일드 하이브리드 등 전기모터를 장착한 모델들을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하이브리드 차량 분야에서 선두기업인 도요타는 전기차 기술을 보유한 마쓰다 자동차와 제휴한다.
2010년 전기차 ‘리프’를 생산하면서 이 분야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닛산은 ‘신형 리프’를 지난 6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리프는 지난 8월까지 글로벌 누적판매량이 28만3000대로 전기차 모델 중 세계 판매 1위다.
앞서 전기차 ‘EV1’의 사망선고를 받아들였던 GM은 2020년까지 약 10개의 전기차 라인업을 갖출 계획이다. 포드는 ‘모델 E’의 새 모델을 2019년 출시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또 2020년까지 45억 달러(약 5조1000억원)를 투자해 전기차 라인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전기차 부문의 선두 주자인 테슬라(1∼7월 전 세계 순수전기차 점유율 13%)는 2018년 연간 전기차 판매량 50만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4개의 신규 모델을 내놓을 예정이다.
세계의 최대 자동차시장을 안방 삼고 있는 중국 업체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2008년 워렌 버핏이 지분 10%를 매입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비야디(BYD)는 중국 정부가 전기차를 7대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선정하고 지원하는데 힘입어 크게 성장하고 있다. 올 1∼7월 전 세계 순수전기차 점유율 6.6%로 지난해 동기 대비 23.2% 성장했다. BYD를 비롯해 베이징자동차, 조티에(Zotye), 체리(Chery) 등 중국업체들은 중국 내에서 판매된 전기차의 43%를 생산해냈다.

반면 국내 자동차 산업의 대명사인 현대ㆍ기아차의 성장 전략은 세계 자동차업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대ㆍ기아차는 지난해 전체 자동차 판매량 5위를 지켜냈지만 전기차 판매에서는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올 3월 미국에 출시한 현대 아이오닉 일렉트릭은 이후 4개월 동안 총 157대 판매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주행거리 등 기술력에서 GM(볼트)ㆍ닛산(리프)의 차종과 비교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대차는 대신 수소전지차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내년에 차세대 수소전기차를 선보인다는 목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세계 차종차 시장은 이미 전기차 경쟁 체제가 됐다. 연구개발(R&D) 비용을 확대해 경쟁력 있는 차종을 신속히 늘리지 않으면 경쟁력이 더욱 저하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내에서 소비자들 검증을 받은 경쟁력 있는 전기차를 세계 시장에 내놓아야한다는 것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세종시 같은 곳을 전기차도시로 활성화한다든지 영업용 택시에 지원금을 더 주고서 전기차화하는 방식 등 정부가 구체적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병주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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