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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 협곡이 노아의 홍수 때 221일 만에 창조됐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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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호 27면

[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창조과학자의 성지 그랜드캐니언

그랜드캐니언. 18억4000만 년 전에서 2억7000만 년 전까지의 지층을 모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협곡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협곡이 기원전 2304±11년에 221일 동안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랜드캐니언. 18억4000만 년 전에서 2억7000만 년 전까지의 지층을 모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협곡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협곡이 기원전 2304±11년에 221일 동안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창조’만큼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창조는 감히 범부들이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 과학과 기술을 담당했던 미래창조부라는 중앙부처 이름이 황당하게 들린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미래창조부 직원조차도 미래창조부나 미창부가 아니라 미래부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곤 했다. 덕분에 지난 정권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그다지 많이 듣지 못했다. 정작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미래창조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름이 바뀐 요즘 창조라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소위 ‘창조과학’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억년에 걸쳐서 천천히 형성’ #일반인 동일과정설 받아들이지만 #성서 곧이 곧대로 믿는 그들은 #‘대홍수 때 갑자기’ 격변설 주장 #낮은 지층서 발견된 어류 화석은 #‘육상 동물보다 먼저 익사’ 설명 #뱀처럼 휜 사행천, 소뿔 같은 우각호 #불과 221일만에 만들어질 수 없어

그나마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연금술과 달리 점성술만큼이나 과학과 무관한 창조과학이 기승을 부리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다. 양국의 창조과학자들이 성지처럼 여기는 곳이 있다.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 바로 그곳. 미국 애리조나주 북부에 있는 고원지대를 흐르는 콜로라도강에 깊이 1.6㎞로 깎인 협곡이다. 길이는 446㎞. 서울~부산 거리보다 길다. 고무보트로 래프팅하는 데 2주일 이상 걸린다.

성서 설명하는 이론 만들고 증거 찾아

그랜드캐니언의 사행천. 뱀처럼 구불구불한 사행천은 대홍수로 생길 수 없다. 오랜 침식 작용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사행천은 그랜드캐니언이 노아의 홍수 때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랜드캐니언의 사행천. 뱀처럼 구불구불한 사행천은 대홍수로 생길 수 없다. 오랜 침식 작용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사행천은 그랜드캐니언이 노아의 홍수 때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한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랜드캐니언이 형성되는 데는 정말 장구한 시간이 걸렸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창조과학자들의 안내로 창조과학탐사에 나선 신앙인들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정말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그랜드캐니언은 하나님의 걸작품이야”라고 생각한다. 창조과학자들은 그랜드캐니언이 노아의 홍수 때 짧은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자들의 특징은 관찰된 증거에서 어떤 이론을 형성해 나가는 일반적인 과학적 사고인 귀납법 대신 성서의 말씀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증명할 현상을 찾아 나가는 연역적인 방법을 쓴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격변설(激變說)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창조과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를 두 단계로 나눈다. 전기 단계는 깊은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불어난 물로 가장 높은 산까지 지구 표면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의 150일이다. 후기 단계는 지구를 덮고 있던 물이 빠져나가서 마른 땅이 드러날 때까지의 221일이다. 창조과학자들은 371일 동안 지구 표면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지구 생명이 동시에 탄생했음을 알려 주는 지질학 및 고생물학적 특성이 퇴적암 지층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구를 덮었던 물이 빠져나가는 과정에 거대한 호수와 협곡이 생겼는데 그랜드캐니언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랜드캐니언이 형성되는 데 기껏해야 221일이면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랜드캐니언에서 창조 당시의 지층과 노아의 홍수 동안 만들어진 지층을 확연히 구분하는 경계를 본다. 창조 당시의 땅은 생물이 창조되기 이전으로 격변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석이 없지만 노아 홍수 동안 만들어진 지층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층마다 생명체의 화석이 달리 존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에 따르면 대양 깊은 곳에 살던 생물들이 가장 먼저 대홍수의 피해를 입어서 가장 낮은 곳에 매장되었다. 그 다음에는 얕은 바다에 살던 물고기 같은 생물들이 매장되고 그 다음에는 양서류와 바다 가까이에 살던 생물들이 매장되고 이어서 파충류처럼 저지대의 늪과 숲에 살던 생물들이 매장됐다. 지능이 높은 포유류들은 홍수를 피해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에 높은 지층에 파묻혔다. 창조과학자들은 낮은 지층에서 높은 지층으로 올라가면서 등장하는 무척추동물→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순서를 지능과 운동성의 차이로 설명한 것이다. 물고기가 육상의 동물보다 먼저 물에 빠져 죽었다니…. 정말로 창조적인 이론이다.

격변설 ‘지구 나이 6000살’ 근거로 만들어져

격변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지구의 나이가 불과 6000년 정도라는 믿음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강가의 둥근 조약돌을 생각해 보자. 상류에 있던 커다란 암석이 풍화되어 쪼개진 후 강물을 따라 지금 있는 자리까지 왔을 것이다. 운반되는 동안 다른 암석에 부딪히면서 둥근 모양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강가에 앉아서 움직이는 조약돌을 본 적이 없다. 조약돌은 큰 홍수가 났을 때만 조금씩 움직일 뿐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천의 침식 속도는 매우 느리다. 대부분의 경우 1년에 수㎜에 불과하다. 그랜드캐니언이 형성되려면 수백만 년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형은 노아의 홍수처럼 짧은 시간에 일어난 격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수없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이론을 동일과정설(同一過程說)이라고 한다. 동일과정설은 현재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으로 과거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동일과정설은 제임스 허튼(1726~1797)이 『지구의 이론』에서 “현재 지구상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통해서만 과거에 일어난 현상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찰스 라이엘(1797~1875)이 1830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로 널리 알려진 이론이다. 동일과정설은 현재는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질 현상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구의 지질 구조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1832년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지질학의 원리』 2권이 비글호에 도착했을 때 다윈은 남아메리카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동시에 동일과정설로 설명되는 수많은 지질학적 현상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지각에서 관찰되는 큰 변화가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어 생긴 결과라는 동일과정설의 아이디어는 작은 변이가 오랜 세대를 거치는 동안 누적되어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생각을 탄생시켰다.

어셔 대주교의 말 따르기엔 용기가 필요

많은 사람들은 격변설과 동일과정설이 막상막하의 이론인 줄 안다. 하지만 격변설은 쉽게 부정된다. 그랜드캐니언만 놓고 보자. 그랜드캐니언을 만든 콜로라도강은 2330㎞에 달하는 긴 강이다. 콜로라도강에는 느린 침식의 증거가 많이 있다. 첫째 증거는 사행천(蛇行川). 그랜드캐니언과 콜로라도강은 뱀이 지나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하다. 느린 침식의 특징이다. 대홍수로 짧은 시간에 생겨났다면 깊은 사행천이 아니라 얕고 넓은 바닥이 만들어져야 한다.

사행천에 침식과 퇴적 작용이 반복되다 보면 강줄기에서 굽은 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호수가 만들어지는데 소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각호(牛角湖)라고 한다. 그랜드캐니언 상류에는 말굽 형태의 우각호가 있다. 불과 221일 만에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지형이다. 증거는 더 있다. 콜로라도강에서 북쪽 숲까지는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데 남쪽 숲까지는 경사가 급하고 좁다. 이것은 북쪽에 내린 빗물이 경사를 통해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경사를 침식시켰지만, 남쪽에서는 계곡으로 빗물이 흘러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급격한 홍수였다면 이런 비대칭적인 지형은 생길 수 없다.

보통의 시민들은 그랜드캐니언을 비롯한 지구 각지의 고생대 이후의 지층이 단 며칠 사이에 만들어졌다는 격변설 대신 수억 년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는 동일과정설을 받아들인다. 창조과학자, 특히 지구의 나이가 6000살에 불과하다는 ‘젊은 지구론’에 빠져 있는 한국의 창조과학자가 되는 데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일단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 성서에 나오는 아담 이후의 연대를 합산해서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오전 9시에 창조되었다고 하는 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의 낭만적인 말(1654년)을 따라야 한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

어떤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A라는 이론과 B라는 이론이 팽팽히 맞선다면 교과서에는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실려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현대 경제학의 영토를 양분하고 있는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이론이 모두 실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은 어떨까? 생물학과 지구과학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함께 실어서 가르쳐야 할까? 아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관계는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의 관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현대 화학과 중세의 연금술 또는 천문학과 점성술 혹은 물리학과 마술의 관계에 해당한다.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창조론이나 진화론이나 모두 신앙 또는 가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은 층위가 다르다. 창조론은 신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몇 가지 전제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이에 반해 진화론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든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자연 현상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과학 이론이다. 생물학과 지질학의 세계를 양분하고 있지도 않다. 99.9%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창조론을 믿어도 된다. 창조과학자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신앙을 과학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성서의 말씀은 신앙과 과학의 문제에도 유효하다. 과학은 신앙을 넘보지 않는다. 신앙도 과학을 넘보지 말고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며 착하게 살자.

 이정모 서울 시립과학관장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안양대 교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역임. 『달력과 권력』『공생 멸종 진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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