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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기자의 心스틸러] '명불허전'의 아쉬운 서정연 활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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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있는 그녀'에서 재벌가 며느리로 넘치는 모정과 한 서린 독기를 동시에 선보인 서정연. [사진 JTBC]

'품위있는 그녀'에서 재벌가 며느리로 넘치는 모정과 한 서린 독기를 동시에 선보인 서정연. [사진 JTBC]

대중문화에서 숫자가 뭐 그리 중하겠느냐마는 때로 숫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2015년 오달수가 국내 최초로 누적 관객 1억을 돌파한 배우가 되자 그에게는 ‘천만 요정’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7번 방의 선물’부터 ‘베테랑’에 이르기까지 1000만이 넘는 영화만 6편에 달해 그가 나오면 무조건 대박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얻게 된 별명이다.

'김과장' '피고인' '품위녀' 등 잇따라 성공 #상승세 견인하는 '시청률 요정'으로 떠올라 #조력자부터 적대자까지 소화 가능 폭 넓어 #'명불허전'서는 단편적 등장에 그쳐 아쉬워

그렇다면 TV 드라마에서 시청률을 견인하는 ‘시청률 요정’은 누구일까. 각각 올 상반기 월화ㆍ수목 미니시리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SBS ‘피고인’(28.3%, 이하 닐슨 코리아 기준)과 KBS2 ‘김과장’(18.4%), 여기에 종편 시청률 역사를 새로 쓴 JTBC ‘품위 있는 그녀’(12.1%)에 모두 출연한 서정연(46) 정도면 감히 그 왕관을 쓸 만하지 않을까.

그녀가 현재 정이연 간호사로 출연 중인 tvN 토·일 드라마 ‘명불허전’ 역시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선 최고의 침술을 자랑하는 허임(김남길 분)과 한의원에서 태어나 동양의학이라면 질색하는 서양의학 신봉자인 외과의 최연경(김아중 분)이 한양과 서울을 오가는 내용으로 시청자들이 환호하는 요소들을 고루 갖췄다. 백전불패를 자랑하는 메디극에 요즘 트렌드에 맞는 타임슬립 물인 데다 멜로와 코미디를 섞었으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진입장벽이 없는 셈이다.

화제성에 비해 시청률은 아쉬운 '명불허전'. 극중 조연들이 설 공간이 부족하다. [사진 tvN]

화제성에 비해 시청률은 아쉬운 '명불허전'. 극중 조연들이 설 공간이 부족하다. [사진 tvN]

한데 2.7%로 시작해 4회 만에 6%대에 진입한 시청률은 좀처럼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김남길과 김아중은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화제성 1위를 다투고, 드라마의 화제성 지수 역시 4주 연속 상승세지만 시청률은 답보 상태인 이유를 조연진이 눈에 띄지 않는 극본과 연출에서 찾으면 너무 무리수일까. 자고로 밀도 있는 드라마라면 주인공을 돕는 친구나 이에 맞서는 적의 역할이 중요한데 ‘명불허전’에는 성가신 이 두 사람을 처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여럿인데도 불구하고 그중 누구 하나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물론 김아중도 조력자를 찾기는 한다. 신혜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그는 급할 때면 “민재야!(김성주 분)”를 외치고 막힐 때면 정 간호사를 찾는다. 가끔은 “어떤 게 진짜 그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말로 묻고 말로 답하니 고유의 캐릭터가 생겨날리 만무하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여 큰 서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치고 박고 지지고 볶는 과정이 필요한데 너무 많은 시공간을 오가다 보니 그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면서 섭외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사진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면서 섭외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사진 SBS]

사실 서정연은 친구와 적을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피고인’에서 그가 선보인 교도소 의무과장 김선화가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조력자라면, ‘김과장’의 조민영 상무는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표독스러움을 지녔다. ‘품위 있는 그녀’의 재벌가 며느리 박주미는 아들과 남편으로 그 중심이 옮겨졌을 뿐 상황에 맞춰 선이 되기도, 악을 택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만큼 꺼내쓸 수 있는 얼굴이 많다는 얘기다.

똑부러진 말투와 미더운 성품은 그가 연기자로서 가지는 남다른 자산이기도 하다. “평소엔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내성적인 성격에 카메라 울렁증도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묘하게 이지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2012년 안판석 PD의 눈에 띄어 드라마로 옮겨올 때부터 그는 대치동 아줌마(‘아내의 자격’)였고, 식당 아줌마를 할지언정 조선족 엘리트(‘밀회’)였고,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비서지만 재벌가 사모님보다 훨씬 더 똑똑했다. 단편적인 면만 부각되고 끝나버릴 수도 있는 조연의 면모를 태생부터 다층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다.

'태양의 후예' 에서 송 닥터 역할을 맡은 이승준 배우와 러브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KBS]

'태양의 후예' 에서 송 닥터 역할을 맡은 이승준 배우와 러브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KBS]

스물다섯 ‘민중의 적’을 시작으로 연극판을 전전하다 직장까지 거쳐 돌고 돌아온 그에게 이곳은 또다른 삶의 터전이 아니었을까. 백화점과 동대문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해도 늘어가는 빚 때문에 “연극을 계속하는 게 사치스럽게 여겨졌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그 어떤 사람도 한 면만 가지고 있지는 않음을 진작에 체득한 셈이다. 심지어 그녀는 39살 모든 걸 접고 취직했다가 안정적인 직장을 박쳐고 나온 돌아갈 곳이 없는 배수의 진을 친 상태였다.

지난해 KBS2 ‘태양의 후예’에서 무려 극중 의사로 등장하는 이승준 배우와 하자애 간호사의 러브라인을 선사했던 김은숙 작가는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밝혔다.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아 그 때 그 저승사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을 만한 대사와 상황을 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이 한 몸 바쳐 마음을 훔칠 준비가 된 배우에게 정녕 그 한 신을 허할 수 없단 말인가. 심스틸러 격에 맞는 활용법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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