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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추적기 끄고 배 이름 바꾸고 … 제재 비웃는 북한 밀수선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장. 마셜 빌링슬리 재무부 테러·금융정보 담당 차관보가 위성사진과 지도를 슬라이드 화면으로 보여 주며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석탄 밀수출을 돕고 있다고 비판했다.

위장 선박 러·중 오가며 석탄 거래 #미 재무부, 위성사진·지도 증거 제시 #FT “수백 척 홍콩회사로 정체 숨겨”

미 정보 당국이 포착한 ‘바이 메이 8’이란 이름의 선박은 카리브해의 세인트키츠네비스 국기를 달고 러시아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트랜스폰더’(배의 위치를 알려 주는 무선 신호기)를 끄고 북한으로 가 석탄을 실었다. 북한에서 빠져나온 뒤 트랜스폰더를 켠 이 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하루 정박한 뒤 중국으로 가 석탄을 하역했다.

빌링슬리 차관보는 “파나마 국기를 단 ‘선 유니언호’와 자메이카 국기를 단 ‘그레이트 스피링호’ 2척도 북한에서 러시아로 석탄을 옮기는 것을 돕고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북한이 선박의 정체를 조작한 것”이라며 “명백한 제재 회피”라고 주장했다. 공화당 테드 포 의원은 “몇 년간 우리는 북한 김씨 일가에 놀아났다”고 했다.

북한의 노회한 선박 조작과 불투명한 선박 교역 네트워크가 국제사회의 거듭된 대북제재에도 북한 경제가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3일 북한 국적으로 의심되는 선박 수백 척이 홍콩에 기반을 둔 유령 해운회사들에 의해 소유·운영되고 있으며, 국기를 바꾸거나 소유권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경제제재를 회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탯은 “거미줄처럼 얽힌 선박 교역 네트워크가 북한의 무역과 통화의 균형을 유지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FT는 홍콩회사 유니언링크인터내셔널이 소유한 ‘돌핀26호’가 대표적이라고 소개했다. 이 회사는 중국·탄자니아·팔라우 등 다양한 국기가 달린 소규모 화물선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선박정보시스템(Equasis)에 따르면 돌핀26호는 지난 8년 동안 소유주와 관리인이 6차례, 선박 이름이 3차례 바뀌었다. 달고 다니는 국기는 5년간 4차례 변했다. 이 회사가 관리하는 ‘오리엔탈 레이디호’도 2003년 이후 국기를 6차례 바꿨는데 두 번은 북한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과정을 밟으면 선박의 배후와 활동을 추적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한다.

미국 안보 분야 연구기관인 C4ADS는 북한과 연계된 사업을 하는 248개 해운회사 중 160곳이 홍콩에 등록돼 있다고 발표했다. 이 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회사는 선박의 국기를 자주 바꾸며 자산이 없는 껍데기뿐인 유령회사를 설립해 등록하는 방식으로 실제 소유주를 가리고 있다. 돈만 주면 명의를 만들어 주는 회사가 많아지면서 같은 주소에 등록된 선박회사도 여럿 확인됐다고 FT는 보도했다.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북한 전문가인 마커스 놀런드는 “북한 국기를 단 노후 선박들은 단속의 타깃이 되기 때문에 점점 북한 교역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기를 단 선박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빌링슬리 차관보는 북한이 제재를 피하기 위해 선박의 정체를 숨기는 기만적 행위를 하는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청문회에서 “북한 선박에 보험을 제공하거나 유지 보수 등 다른 서비스를 하며 돕는 측도 제재의 타깃으로 삼겠다”며 중국 측을 압박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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