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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케미포비아 쓰나미 지나간 자리 … 불신·공포만 나뒹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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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의 세상만사 

지난달 23일 경기도 광주시 산란계 농장에서 방역 관계자들이 비펜트린이 초과 검출된 계란을 폐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경기도 광주시 산란계 농장에서 방역 관계자들이 비펜트린이 초과 검출된 계란을 폐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프로닐이나 비펜트린’ ‘총휘발성유기화합물(TVOC)’…. 화학도가 아니라면 생소하기 짝이 없는 유해 화학물질들의 이름이다. 전자는 살충제 계란에서, 후자는 여성 생리대에서 검출됐다. 곧바로 한국 사회는 8월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공포의 확산에는 이유가 있다. 잘 모르는 유해 물질에 대한 불안과 정부·기업에 대한 불신이다. ‘케미포비아(화학물질 공포증)’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2~3주 뒤에 그 흔적들을 더듬어 보니 우리가 마주했던 게 합당한(?) 공포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실제보다 과장된 정보들에 허우적대면서 과도한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아닐까?

릴리안 사태 ‘깨끗한나라’ 가보니 #폭탄 맞은듯 고요, 직원들 우왕좌왕 #안만호 “문제 제기 방식 잘못” #김만구 “컵라면용기도 내가 검증” #곽금주 “현 정부도 불신사회 같아” #네티즌 “특정 중소기업 마녀사냥”

12일 오후 6시쯤 생리대 ‘릴리안’의 제조사인 ‘깨끗한 나라’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중구의 신조양빌딩 8층. 기자가 예고 없이 들어서자 경영기획팀 직원들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홍보를 겸임한다는 그들은 기자가 “TVOC가 검출된 릴리안 생리대를 환불하느라 피해가 크겠다.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판매·제조 담당 직원 600여 명이 일손을 놓고 쉬고 있다. 정확한 피해액은 집계 중”이라고 답했다. 이어진 질문에는 손사래를 치며 “회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답변을 회피했다. 회장실로 가려 하자 비서실 여직원이 가로막았다. 사무실에 전시된 1억 달러 수출탑도 사진을 못 찍게 했다.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1966년 창사 이래 51년 만에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매출 7000억원인 회사는 8월 중순 유해 물질이 검출된 ‘릴리안’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조사를 받고 3100명으로부터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8월 말 릴리안 제품의 생산·판매 중단과 전 제품 환불 조치를 결정한 회사는 김만구(환경과학과) 강원대 교수를 업무방해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김 교수는 여성환경연대 의뢰로 일회용 생리대 제품 10개(4개사)를 대상으로 유해 물질 방출실험을 한 뒤 전 제품에서 TVOC가 나왔다고 발표한 학자다. 회사 측은 “김 교수의 모든 실험 제품에서 유해 물질이 검출됐는데도 릴리안만 제품명을 공개해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298만여 명이 가입한 네이버 카페 ‘레몬테라스’에는 이런 글이 보였다. “더 화가 나는 건 전부 다 같이 조사하지 않는 건 뭔가 싶고, 중소기업 죽이는 마녀사냥 같은 느낌도 들고…. 국내 생리대가 다 도긴개긴인데 (중략) 릴리안만 놓고 문제 삼으면 타 업체들은 쉬쉬하고, 우리는 그대로 그 물건을 쓰고….”(달콘뉴정)

여성 생리대 ‘릴리안’ 제조사인 ‘깨끗한나라’ 사무실 입구 모습. [조강수 기자]

여성 생리대 ‘릴리안’ 제조사인 ‘깨끗한나라’ 사무실 입구 모습. [조강수 기자]

안만호 식약처 대변인은 시민단체와 김 교수가 생리대의 유해성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문제 제기의 절차와 방식이 옳았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김 교수가 지난 3월에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달 김 교수가 특정 회사 제품(릴리안)을 언급하고 이게 특정 언론에 보도되면서 폭발력이 커졌다. 그로 인해 문제를 제기했던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정부·기업·학계 전문가들이 모두 불신의 대상이 되고, 국민들은 피해자가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함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학 전문가에게 ‘식품을 많이 먹으면 안 좋겠죠’라고 물어본 뒤 긍정적 대답을 듣고 기사를 쓰면 되겠느냐. 김 교수는 대기환경 분야 분석 전문가다. 생활화학용품 유해 평가 전문가는 아니다. 어떤 물질의 유해성과 위해를 실제 가한 것은 개념이 다르다.”

안 대변인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선 ‘유해 물질이 나왔다’라고 하면 그걸로 끝난다. 언론이 여과 없이 받아써 공포가 커지면 그 후엔 어떤 전문가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 악순환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9월 말 식약처의 유해성 전수조사 결과 발표가 매듭을 짓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만구 교수는 강하게 반박했다. “어떤 물품의 유해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저 같은 사람이 실험 방법을 개발하고 독성 학자들이 독성을 알아내고 의사 등이 노출 경로, 즉 여성들이 생리대를 하루 한 번 또는 두 번 끼는지, 몇 시간 끼는지, 1회 생리 때는 얼마나 하는지 등의 정밀 임상 조사를 해야 한다. 식약처가 ‘생리대 안전검증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해성, 독성 하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나의 연구결과를 엉터리라고 몰아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김 교수는 자신이 98년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 호르몬이 나오는 것을 제일 먼저 검증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오염 물질을 줄이려고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끓여서 분석했다. 그랬더니 식약처에서 컵라면은 뜨거운 물로 불리는 것이지 전자레인지에서 끓이는 게 아니라서 ‘가혹조건’에 해당해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나왔다. 실제로 편의점 등에서 전자레인지에 끓여 먹는데도 말이다. 이후 식약처는 컵라면에 전자레인지 사용 금지 표시를 넣고 빠져나갔다. 내가 당시 판매된 컵라면을 갖고 있다. 젖병과 플라스틱 용기, 장판 등에 유해 물질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제가 확인했다. 산성 안개도 처음 밝혀냈다. 식약처 공무원들은 내가 그런 걸 한 줄도 모른다.”

9월에 인체 유해성 결과가 나온다는 식약처 입장에 대해선 “나올 수가 없다. 한 달 만에 여성의 질에 유해 물질이 얼마나 녹아들어 가는지를 조사할 재간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생리대가 한국에서 생산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안전성 검사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역대 정부에서 케미포비아 문제는 예외 없이 되풀이됐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장되거나 근거 없는 괴담들이 서너 시간이면 전국을 휩쓰는 반면 정부 대응은 늦기 일쑤였다”며 “그 결과 불신이 커지고 그 불신이 케미포비아를 증폭시켰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사건 때는 선사인 청해진해운이 정면돌파할 용기가 없었고, 메르스 사태 때도 정부가 대응을 잘 못해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살충제 계란도 마찬가지다. 이번 정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똑같다. 불신사회를 신뢰사회로 만들어야 케미포비아가 사라진다.”

곽 교수는 침묵하는 전문가들도 문제로 지적했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 수의대 교수랑 밥을 먹는데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직접 나서라고 했더니 ‘내가 왜 진흙탕에 들어가느냐’고 했다. 전문가들의 직무유기도 심각하다.”

두 사건을 키운 데는 류영진 식약처장의 안일하고 오락가락한 대처도 한몫했다. 그는 “국내산 계란과 닭고기에서는 피프로닐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성인이 하루 126개까지 살충제 달걀을 먹어도 괜찮다”고 발표했다가 거센 질타를 받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숙제는 하나다. 살충제 계란과 생리대의 인체 위해성 여부를 끝까지 과학적으로 검증해 처벌과 배상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케미포비아가 휩쓸고 간 뒷자리를 더듬어보면서 어쩌면 괴담은 인재(人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