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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깡, 그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금기어를 듣다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채인택 국제전문기자의 미시세계사

‘땡깡’은 간질을 뜻하는 전간(癲癇)의 일본어로 일제잔재 #‘간질’도 2009년 ‘뇌전증’으로 순화하기도 학회에서 결정 #일제잔재이자 환자에 차별적인 이런 ‘낡은 용어’ 추방해야 #환자 중엔 레닌, 칼리굴라, 영국 왕자, 미국 퍼스트 레이디도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했다는 말은 사람들의 귀를 의심하게 한다. 보도에 따르면 추 대표는 “(국민의당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땡깡’을 부렸다. 땡깡을 놓는 집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김이수 부결’로 충격에 빠진 상황에서 열린 의원총희니만큼 감정이 격앙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흥분한 상황에서라도 할 수 있는 말과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말이 따로 있다. ‘땡깡’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다.

땡깡은 두 가지 의미에서 써서는 안 된다. 첫째 이 말은 덴캉(癲癇, てんかん)이라는 일본어에서 왔다. 우리말로 정착한 외래어가 아니고, 외국어인 일본어다. 일제시대 한국에 들어와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국어사전에서 이 낱말이 ‘1.사람들에게 떼(억지)를 쓰는 것 2.소란스럽게 난동을 부리면서 억지를 쓰는 것’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이미 정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겨우 우리말로 순화한 ‘단무지’라는 낱말 대신 다시 ‘다꾸앙’이라는 일본어를 쓰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따라서 ‘땡깡’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일제 잔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셈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을 써서는 안 되는 둘째 이유는 이 말이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차별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식 한자 읽기로 전간(癲癇), 일본어로 덴캉으로 읽는 이 한자말은 바로 간질(癎疾)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던 신경 질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신경장애의 일종인데 갑자기, 이유 없이 발작이 일어난다, 발작과 경련을 동반하는데 그 기간 동안 환자는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뇌신경 세포가 불규칙하게 과도한 흥분을 일으켜 뇌에 전기적 신호가 과도하게 발생한 것은 원인으로 추정한다. 어려서 병이 시작하기도 하도 나이가 들어 첫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갑자가 사라지기도 하는데, 약물과 식이요법, 수술 등으로 관리가 가능하다.

과거 의약 분야에서는 이 병을 ‘전간’으로 불렀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왔다. 민간에서는 ‘간질’과 함께 ‘지랄병’이나 ‘천지랄’ 등으로 불렀다. 이런 용어는 처음에는 단순히 증상을 나타내는 질병 이름으로 시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양한 이상 행동에 이 용어를 붙이면서 차차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랄’이라는 말은 비속어가 되어갔다. ‘간질’도 부정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이들 용어 자체가 편견이나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한간질학회에서는 2009년 6월7일 간질이라는 용어를 뇌전증(腦電症)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뇌와 전기를 합쳐서 만들었다. 이 병에 대한 일반인의 거부감을 줄이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불이익을 불식하려는 의도에서다. 일반인에게서 그런 용어를 듣는 가족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차별적이고 모욕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용어라도 순화해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매만지겠다는 의학계를 비롯한 보건의료 종사자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이런 용어 순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인식을 바꾸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반면 낡은 용어를 그대로 마구 쓰는 사람을 만나면 환자나 장애인, 그리고 가족의 가슴은 눈물로 젖는다.

의료계도 나서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정치 지도자가 다른 정당을 비난하는 데 그런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용어를 동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추 대표가 굳이 그렇게 험한 말을 하고 싶다면 ‘생떼’ ‘억지’ ‘행패’ ‘막무가내’ 등 다양한 우리말을 쓰면 된다. 추 대표가 이 말이 일본어인데다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단어일줄 모르고 사용했다면 지금이라도 환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설마 추 대표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약 0.5%정도인 39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매년 12만5000명 정도가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는 인구의 약 40만 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전제 환자의 70%는 관리가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뇌전증 환자는 참으로 많다. 로마 황제 칼리굴라(12~41)는 20대 후반인데도 갑자기 현기증에 시달리고, 보행은 물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든 건강이상 증상을 겪었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고 한다. 현대 의학자들은 뇌전증을 앓은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 황제 칼리쿨라는 어려서부터 뇌전증 증세를 겪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 황제 칼리쿨라는 어려서부터 뇌전증 증세를 겪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생애 마지막 몇 달을 병상에서 지냈는데 당시 나타냈던 신경이상과 신체기능 상실 증상이 뇌전증과 비슷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세상을 떠날 당시 50분간에 걸쳐 발작을 겪다가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말년에 뇌전증 증세를 보였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말년에 뇌전증 증세를 보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막내 삼촌인 존(1905~1919) 왕자는 4살 때 뇌전증이 발병해 평생 안고 살았다. 지적장애와 자폐증도 함께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 가족은 존 왕자를 방문객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골 별장에서 지내도록 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숨은 왕자’로 살던 그는 발작을 겪다 10대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막내 삼촌인 존은 어려서 뇌전증 증세가 시작돼 시골 별장에서 생활하다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막내 삼촌인 존은 어려서 뇌전증 증세가 시작돼 시골 별장에서 생활하다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정치인으로 성공한 뇌전증 환자도 있다. 아일랜드 국회의원과 더블린 시장을 지낸 조 도일(1936~2009)은 16세 때부터 뇌전증을 앓았으나 병을 잘 관리하면서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았다.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았으며 뇌전증 환자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일랜드 뇌전증협회장으로 봉사하다 세상을 떠났다.

뇌전증 환자 중에는 불굴의 노력으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운동선수도 적지 않다. 프랑스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였던 에르베 부사르(1966~2013)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여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4명의 선수가 팀을 이뤄 102.8km를 함께 달리는 남자단체 종목에서다. 지구력과 협동심, 책임감이 동시에 필요한 종목이다. 부사르는 2013년 발작 도중 숨을 거뒀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이클 남자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프랑스의 에르베 부사르 선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이클 남자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프랑스의 에르베 부사르 선수.

예술로 병을 이긴 사람도 상당수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82)의 아들 오에 히카리(大江光, 54)는 어려서 뇌전증, 자폐, 지적장애를 동시에 앓았다. 하지만 음악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11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3살 때부터 작곡에 나서 1992년부터 2005년까지 4집의 CD를 냈다. 이 중 2집은 1994년 일본골든디스크대상을 받았다. 이모부인 영화감독 이타미 쥬조(伊丹十三, 1933~1997)의 작품 ‘조용한 생활’의 영화음악을 맡아 일본아카데미상 우수음악상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아들인 작곡가 오에 히카리. 히카리는 뇌전증, 지적장애, 자페를 앓고 있음에도 음악가로 이름을 얻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아들인 작곡가 오에 히카리. 히카리는 뇌전증, 지적장애, 자페를 앓고 있음에도 음악가로 이름을 얻었다.

미국 제25대 대통령(재임 1897~1901) 윌리엄 매킨지(1843~1901)의 부인인 아이다 매킨지(1847~1907)는 성인이 된 뒤 뇌전증이 찾아와 종종 난감한 경우를 겪었다. 백악관 공식 만찬에서 발작이 온 적도 있는데 남편인 대통령이 당황하지 않고 영부인의 얼굴을 냅킨으로 감싸줬다는 일화가 있다.

미국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지의 부인 아이다 매킨지는 성인이 된 뒤 뇌전증 증상을 겪었다. 백악관 공식 만찬 도중 증세나 나타나자 남편이 냅킨으로 응급 처치를 했다고 한다. 뇌전증에는 가족 사랑이 필요하다.

미국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지의 부인 아이다 매킨지는 성인이 된 뒤 뇌전증 증상을 겪었다. 백악관 공식 만찬 도중 증세나 나타나자 남편이 냅킨으로 응급 처치를 했다고 한다. 뇌전증에는 가족 사랑이 필요하다.

이처럼 전간증에는 가족의 사랑이 필요하다. 사회의 관심과 협조도 절실하다. 무엇보다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낡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예의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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