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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조각 2400개 해체·조립 20년 끝이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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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0년째를 맞은 백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이 오는 11월께 마무리된다. 전체 6층 가운데 현재 5층 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문화재청]

올해로 20년째를 맞은 백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이 오는 11월께 마무리된다. 전체 6층 가운데 현재 5층 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문화재청]

지난 5일 찾아간 미륵사지 석탑 공사 현장. 5층 복원 공사 모습이다. 익산=박정호 기자

지난 5일 찾아간 미륵사지 석탑 공사 현장. 5층 복원 공사 모습이다. 익산=박정호 기자

한국은 ‘석탑의 나라’다. 워낙 산이 많은 땅인지라 조상들은 돌을 깎아 탑을 올리며 불심(佛心)을 키웠다. 대략 1500여 개의 석탑이 우리 강산과 가람을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 맏형이 있다. 전북 익산시 백제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639년 조성)이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꼽힌다.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된다.

백제 미륵사지석탑 복원공사 마무리 단계 #한국 석탑의 모태, 국내 최대·최고로 꼽혀 #티나늄봉, 3D 스캐닝 등 첨단기술 총동원 #

해체되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 모습. 동쪽 측면. [사진 문화재청]

해체되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 모습. 동쪽 측면. [사진 문화재청]

보수 공사가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 투시도. 최종 모양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보수 공사가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 투시도. 최종 모양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은 1400년 가까운 풍상을 견뎌왔다. 오랜 세월 속에 많은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꿋꿋이 버텨왔다. 300여 년 전쯤 될까, 탑신(塔身) 서측면이 허물어지자 조선시대 사람들을 그 뒤로 석축을 쌓아 탑이 무너지지 않게 했다. 1915년 일제는 콘크리트를 덧씌우는 공사를 했다. 요즘 관점에선 “흉물이 됐다” “문화재를 망쳤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으나 당시로선 신소재로 보강공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더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1998년 안전진단을 실시했다. 병세가 깊었다. 해체·조립이 결정됐다. 그러기를 올해로 20년째. 탑 안팎 돌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크기를 재고, 생김새를 알아내고, 또 이를 다시 쌓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일 문화재 보수로는 역대 최장 기록이다. ‘빨리빨리’에 길들어진 요즘 한국 문화에 대한 반면교사로 꼽힌다.

일제는 1915년 미륵사지 석탑 보강을 위해 탑신에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컴퓨터로 콘트리트를 제거한 모습. [사진 문화재청]

일제는 1915년 미륵사지 석탑 보강을 위해 탑신에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컴퓨터로 콘트리트를 제거한 모습. [사진 문화재청]

 그 어머니 같은 탑이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올 11월께 예전의 웅장한 모습을 되찾는다. 지난 5일 현장을 둘러봤다. 석탑을 임시로 감싼 덧집부터 우람하다. 가로 58m, 세로 31m, 높이 29m 크기다. 탑 주변에 나무 비계(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게 설치한 가설물)가 층층이 둘러져 있다. 전체 6층 가운데 현재 5층 옥개석(지붕돌) 조립이 한창이다. 두 달 후 동서남북 기단 폭 12.5m, 높이 14.3m, 무게 1892t의 탑 전모가 드러난다. 17년째 석탑과 함께해온 김현용 현장팀장(41·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은 “오랜 공사의 9부 능선을 넘어섰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했다.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참고 자료가 거의 없다.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다. 발굴→해체→조립 모든 과정이 도전이었다. 해체에만 10년, 조립에만 4년이 걸렸다. 수습한 석탑 돌만 2400여 개다. 잡석을 포함하면 3000개 가까이 된다. 길이·두께·모양이 모두 다르다. 같은 게 하나도 없다. 그것을 일일이 측량하고, 3D 스캐닝도 했다. 해체된 돌을 토대로 조립 설계를 했다. 하지만 설계와 시공에선 차이가 났다. 조립하면서 다시 맞추고, 도면도 보완해갔다.”

 -원래 9층탑이 아닌가.

 “절반 이상이 붕괴돼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다. 문화재 수리의 대원칙은 원형 보존이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손댈 수 없다. 최대한 옛 부재(部材)를 살려 썼다. 처음에는 47% 남짓 예상했는데 보존처리 하면서 72%까지 높였다. 그간 많은 소득도 있었다. 옛 돌의 손상된 부분과 새 재료를 연결하는 데 티타늄 봉을 본격적으로 썼다. 원 재료의 금간 부위는 에폭시 수지로 보강했다. 돌과 돌 사이 빈틈을 메우는 무기질 재료도 새로 개발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나온 금제사리 봉영기. 백제 왕후가 639년 가람을 창간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문화재청]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나온 금제사리 봉영기. 백제 왕후가 639년 가람을 창간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백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물들이다.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백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물들이다.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주석에서 나온 금동제사리 외호(왼쪽)과 금제사리내호.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주석에서 나온 금동제사리 외호(왼쪽)과 금제사리내호. [사진 문화재청][

 미륵사지 탑은 삼국시대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마치 목조건물처럼 돌을 맞춰가며 쌓았다. 수많은 석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참고로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의 부재는 64개다. 수리 현장에서 만난 국가무형문화재 제120호 이재순 석장(石匠)은 “새로 다듬은 돌도 옛 것과 성분·빛깔·결 등이 최대한 비슷하게 골랐다”고 했다. “옛날 돌은 높낮이가 모두 다르다. 자연 그대로 생긴 모습을 살려 표면이 거친 편이다. 새 돌도 그렇게 가공했다. 반듯하게 깎는 것보다 품이 세 배 가량 들었다”고 설명했다.
 석탑은 내년 하반기께 일반 공개된다. 앞으로도 덧집 철거, 주변 정비 작업이 남아 있다. 내년까지 21년간 들어갈 사업비는 총 225억원. 배병선 보수정비단장은 “지난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우리 건축문화재 보존기술이 한 단계 뛰어올랐다. 다른 문화재 복원의 전범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륵사지 수리 경험은 석가탑 해체·복원(2012~2016)에도 큰 참고가 됐다.

 석탑 1층 안으로 들어가봤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길이 8.5m, 폭 1.5m 통로가 있다. 탑의 중심 공간으로, 다른 석탑에선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 한복판 심주석(기둥돌)에서 2009년 금동사리호·유리구슬 등 유물 9000여 점이 쏟아졌다. 당시 나온 사리는 13점은 2015 년 말 제자리에 재봉안됐다. 1400년 전처럼 부처의 깨우침이 사방으로 뻗쳐가라는 마음에서다.

 김현용 팀장의 감회를 물었다. “대학 졸업 당시 계약직으로 처음 왔던 기억이 새롭네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웃음) 완공이 되도 현장을 지켜야 해요. 연구할 게 수두룩하거든요. 탑이 천년만년 버텨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잘 버틸 겁니다.”

 익산=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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