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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유혹, 그 끝에 남은 것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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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호 30면

남북전쟁이 4년째로 접어든 1864년의 미국. 북부군 존(콜린 파렐)은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적진인 버지니아의 숲속에 고립된다. 버섯을 캐러 온 소녀 에이미(우나 로렌스)에게 발견돼 몸을 피한 곳은 원장 마사 판스워스(니콜 키드먼)가 운영하는 여자 신학교. 전쟁으로 학생들이 돌아가 버린 학교에는 이제 원장과 프랑스어 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 에이미를 비롯한 학생 다섯 명이 남아있다. 적군의 눈을 피해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던 여자들 사이에 갑자기 등장한 젊은 남자 존을 두고 감춰져 있던 사람들의 욕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감독: 소피아 코폴라 #배우: 니콜 키드먼 #커스틴 던스트 콜린 파렐 #등급: 15세 관람가

여기까지의 줄거리만 봐도 재밌을 것 같다. 여자들만 사는 외딴 저택, 그리고 부상을 당해 그곳에 머물게 된 한 명의 남자. 뭔가 으스스하고 끈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솔솔 풍기지 않는가. 예감은 맞았다. 소설가 토마스 컬리넌이 1966년 발표해 화제가 된 이 작품은 이미 1971년 돈 시겔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를 본 소피아 코폴라(46) 감독은 “원작자나 시겔 감독과는 달리 여성의 시선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리메이크를 결심했다 한다. ‘대부’를 만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로, ‘처녀 자살 소동’(1999)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마리 앙투아네트’(2006) 등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감독다운 자신감이다. 그는 ‘매혹당한 사람들’로 올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원제는 ‘The Beguiled’. ‘Beguile’은 ‘구슬리다’ ‘이끌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낯선 남자에게 이끌린 여자들의 유혹과 질투를 그릴 것 같지만, 그리 단순하진 않다. 마사 원장은 부상병인 존을 남부군에게 넘겨야 하지만 그의 다리 부상을 핑계로 계속 저택에 머물게 한다. 답답한 생활에 진저리 치던 에드위나는 존에게 호감을 품고 그의 곁을 맴돈다. 소녀들도 지루하던 일상에 나타난 이 남자에게 관심을 빼앗긴다. 존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자들의 호의를 즐기며, 이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한다. 에드위나에겐 “당신 같은 미인은 처음 보오”라며 꼬드기고 자신을 구해준 소녀 에이미에게는 “네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속삭인다. 살아남기 위해 여자들을 유혹하는 존의 행동은 그러나 ‘어떤 사건’으로 파국을 맞는다.

71년 작품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당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존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뽐내며 닥치는 대로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로 그려진다. 이에 반응하는 여자들 역시 뜨겁지만 전형적이었다.

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극적인 장면이나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미묘한 분위기와 시선 등으로 갈등을 보여주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화면은 잡초가 우거진 앞마당과 흐린 하늘, 바람 부는 숲을 자주 비춘다. 물수건으로 존의 몸을 닦아주며 머뭇거리는 마사의 표정, 레이스가 달린 잠옷을 차려 입고 정성스레 머리를 빗는 에드위나의 모습 등은 대사 한 마디 없어도 인물들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한정된 공간에서 8명 사이에 일어나는 이야기라 구성과 진행이 다분히 연극적이다. 실제로 원작 소설을 쓴 토머스 컬리넌은 인기 연극 ‘링컨 부인’ 등을 쓴 극작가이기도 했다. 코폴라 감독은 이런 원작의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살려냈다. 특히 음악실에만 머물던 존이 식당에서 여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의 묘사는 탁월하다. 여느 날과 달리 한껏 차려 입은 여자들이 나란히 앉아 “선생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너도 예쁘구나” 칭찬을 주고받으며 경계하는 대목에서 여성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전작이 흑인 하녀를 등장 시켜 그 시대 인종 문제를 건드린 반면, 이번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의상을 제외하면 시대를 지운 듯 현대적인 느낌을 준 것도 감독의 의도처럼 보인다. 여자들이 자신에게서 호감을 거두자 한 순간에 돌변해 총을 들고 날뛰는 존의 모습은 46년 전 영화 속의 존보다 훨씬 어리석고 충동적이고 파괴적이다. 여자들이 단호한 표정으로 문 앞을 지키고 선 마지막 장면은 여성들의 연대를 은유하는 장면으로 읽어도 무리가 아닐 듯 하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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